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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디올부터 인텔까지, 팝업 평정한 성수동…기업·MZ 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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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서울 성동구 지하철 2호선 성수역 3번 출구에서 170m를 걷자 'Intel'과 'AI(인공지능), Everywhere'라고 적힌 한 매장 앞에 모여 있는 20여 명이 보였다. 출입구에선 직원 대신 두 대의 키오스크가 이들을 맞았다. 키오스크에 이름 또는 별명, MBTI 유형을 누르자 그와 어울리는 사람 이미지가 담긴 'AI 신분증'이 나왔다. 신분증을 다른 문에 대니 미국 정보통신(IT) 기업 인텔이 AI를 소재로 한 팝업스토어 내부가 눈 앞에 펼쳐졌다.
노트북 신제품들이 수십 대 진열돼 있어 전자제품 매장 같으면서도 다른 한 쪽에는 흰색 티셔츠들이 걸려 있어 마치 옷 가게에 온 듯 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인텔의 AI 노트북을 활용해 생성한 이미지를 새긴 'AI 티셔츠'가 인기였다. 하루 80명이 직접 티셔츠를 만들어 볼 수 있는데 이 날은 일찌감치 마감됐다고 한다. ①인텔이 자체 개발한 생성형 AI가 들어있는 노트북에 원하는 명령어를 영어로 입력하면 ②모니터에 이미지가 나타나고 ③그 결과물이 이상이 없다고 확인하면 직원이 바로 옆 프린팅 기기로 연결해 티셔츠를 찍어 내는 식이다. 자동차가 그려진 티셔츠를 제작했다는 대학생 박모씨는 "AI에 관심이 많아 아침부터 부랴부랴 성수동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박민진 인텔코리아 상무는 "노트북 회사의 한 해 장사를 좌우하는 신학기 시즌을 맞아 MZ(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세대가 많이 모이는 성수동은 제품을 알리기에 안성맞춤"이라며 "AI 노트북이 기존 제품과 어떻게 다른지 써보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팝업스토어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으로 물건을 비교하고 사는 온라인 쇼핑 대세 시대에 백화점, 대형마트 등은 고전하고 있지만 팝업스토어 만큼은 예외다. 특히나 젊은 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수동은 '팝업스토어 성지(聖地)'로 뜨고 있다. 제품 홍보, 이미지 개선 같은 숙제를 해야 하는 기업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2020년대 들어 식품 의류 분야 회사들이 처음 팝업스토어를 차리기 시작한 이후 점점 많은 기업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이어 명품 브랜드, 편의점 업체, 김치 회사, 럭셔리 자동차 회사, IT 회사도 속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업뿐만이 아니다. 문화 예술 관련 작가나 활동가들도 다양한 전시 공연 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의 브루클린'이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팜업스토어는 온라인에 잠깐 떴다가 사라지는 '팝업창'에서 비롯했다. 문자 그대로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두 달 가량만 운영하는 상점이다. 그런 팝업스토어의 시작은 2009년 2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터를 잡은 나이키, 같은 해 10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연 제일모직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로 알려져 있다.
이후 TV·라디오 등 전통적 매체를 찾던 기업들이 광고·마케팅 수단으로서 팝업스토어에 주목했다. 종합광고회사 디블렌트의 이응탁 국장은 "소비자가 팝업스토어에 와서 느끼는 경험의 밀도는 TV 광고와 비교할 수 없다"며 "젊은 세대의 즐길 거리가 영화관, 식당, 쇼핑가 등 틀에 박힌 상황에서 팝업스토어는 신선하고 새로운 놀이터"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 곳곳의 핫플레이스(핫플)에 팝업스토어를 차리기 시작했다. 단 지역마다 유형은 달랐다. 청담동은 명품, 가로수길은 패션·먹거리(F&B), 홍대는 아이돌·게임·캐릭터 팝업스토어가 주로 열렸다.
성수동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게 떴고 팝업스토어도 활발하지 않았다. 수제화 거리, 자동차 정비 공장으로 유명했던 성수동은 오히려 저무는 동네에 가까웠다. 시간이 갈수록 버려진 공장과 부지가 늘어났는데 이 것이 반전의 씨앗이 됐다.
10여 년 전 예술가들과 스타트업이 둥지를 틀고 난 뒤 특색 있는 식당, 카페 거리가 생기자 이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었다. 성수동에 즐비한 텅 빈 공장과 공터는 각 기업·브랜드가 자신만의 이미지를 팝업스토어로 표현하기에 좋은 토양이었다. 이전까지 팝업스토어 주 무대였던 서울 강남의 번화가, 마포구 홍대 일대, 주요 백화점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도 기업을 끌어 당겼다.
말끔하고 정돈된 기존 팝업스토어와 다르게 MZ세대가 선호하는 거칠고 날 것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점도 성수동만의 강점이다. 지난해 10월 선보인 대상 종가의 '김치 팝업스토어'가 좋은 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낡은 공장을 세련되게 탈바꿈 한 팝업스토어에 김치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MZ세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상은 이 팝업스토어로 최근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2개 부문(상업 전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시작한 2020년 무렵 팝업스토어로 붐비기 시작한 성수동이 팝업스토어 세계를 평정한 건 2022년 4월로 여겨진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명품브랜드 디올이 성수동에 둥지를 튼 것이다. 디올의 등장은 성수동에 팝업스토어를 두면 흥행은 떼 논 당상이라는 점을 재계에 확실히 알렸다. 현재 디올의 팝업스토어는 아예 상설 매장으로 전환했다. 다른 명품 브랜드인 샤넬도 성수동에 향수 팝업스토어인 '조향 마스터클래스'를 운영 중이다.
팝업스토어가 몰리면서 성수동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이는 통계로 잘 알 수 있다. 하루 평균 지하철을 타고 성수역에서 내리는 인원은 2019년 3만1,100명에서 2020년 2만7,700명으로 떨어졌다가 2021년 3만400명으로 곧바로 회복했다. 지난해엔 4만400명으로 2019년보다 1만 명 가까이 늘었다. 서울 시내 또 다른 주요 상권인 건대입구역, 명동역, 신촌역, 혜화역의 지난해 하차 인원이 아직 2019년 수준을 밑도는 모습과 대비된다.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도 성수동에 꽂혔다. BC카드가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과 지난해 외국인 결제 건수를 주요 상권별로 따져본 결과 성수동은 973% 뛰었다. 전체 비교 지역 중 가장 큰 증가 폭으로 여의도(479%), 한남동(429%)이 뒤를 이었다.
성수동 팝업스토어는 다채롭다. 기존 팝업스토어 명소를 모두 합친 '종합판'과 같다. 여러 기업·브랜드가 각각의 신제품을 알리거나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새기기 위해 차별화 한 팝업스토어를 마련하지만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경험'과 '입소문(바이럴) 마케팅'이다.
김우현 제일기획 팀장은 "팝업스토어는 신제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을 엿보는 테스트 베드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브랜드 경험을 주는 공간"이라며 "소비자가 기업·제품을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기억할지를 다룬 '체험 여정' 기획에 가장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 처럼 성수동 팝업스토어는 단순한 기업·제품 홍보를 넘어 보고, 듣고, 먹고, 만지는 등 오감으로 체험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LG전자가 2021년 말 문을 연 '금성오락실', 선양소주가 지난해 오픈한 '플롭선양'이 대표적이다.
최신 올레드(유기발광다이어드·OLED) TV로 복고 게임을 즐기는 금성오락실에서 LG전자 신제품이 자연스럽게 노출됐다. LG전자는 성수동에서의 성공을 이어받아 금성오락실을 부산 광안리, 서울 강남역에서도 운영했다.
'선양에 빠지다'를 주제로 한 플롭선양은 병뚜껑 모양의 배를 타고 물을 헤쳐 나가 선양소주 상징인 고래를 찾는 과정으로 꾸며졌다. 소비자가 선양소주를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충청 을 기반으로 한 지역 소주 이미지가 강했던 선양소주는 팝업 스토어로 MZ 세대와 많이 가까워졌다는 게 자체 평가다.
지난해 흥행한 대상의 김치 팝업스토어 역시 경험 제공에 충실했다. 김치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 층을 겨냥해 세련된 건물 디자인은 물론 김치를 사용한 타르트·케이크 등 상상을 뛰어넘는 메뉴를 선보였다. 대상 관계자는 "두 달 동안 서울의 다양한 지역을 검토한 결과 MZ 세대, 가족, 외국인이 두루 경험할 수 있고 김치라는 낯설지만 새로운 경험에 대한 수용도가 높은 성수동을 팝업스토어로 최종 선정했다"며 "단순히 반찬으로 인식된 김치를 새롭게 경험하게 했다는 점에서 호감도를 높이고 긍정적인 인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소문 마케팅 차원에서 성수동 팝업스토어마다 공들이는 건 '포토 존'이다. 현장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을 거쳐 널리 공유될 경우 방문자 수가 제한적인 오프라인 매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마침 SNS 주도권이 글 기반인 페이스북에서 사진 중심인 인스타그램으로 넘어가면서 색다른 포토 존 여부는 팝업스토어 흥행을 좌우하게 됐다.
경험, 바이럴 마케팅은 더현대서울, 잠실 롯데월드몰·타워 등 팝업스토어 라이벌인 주요 백화점 점포도 강조하는 요인이다. 다만 정해진 장소가 있는 백화점과 달리 성수동은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하기 쉽다. 성수동 팝업스토어는 백화점보다 다양한 형태의 체험을 제공하고 입소문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성수동은 팝업스토어 성지의 위치를 당분간 지킬 전망이다. 땅값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팝업스토어, 카페, 식당이 어우리진 'MZ 클러스터'로 자리매김했고 성수동을 대체할 지역도 아직 없어서다. 성수동 팝업스토어의 범위가 IT 기업(인텔), 금융권(하나은행·NH농협은행), 지방자치단체(서울시) 등으로 넓어지고 있는 점도 지속·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스타그램 '이나스픽'이라는 계정으로 매주 성수동 팝업스토어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이나(예명) 씨는 "대부분 팝업스토어가 체험 공간을 내세우고 있지만 도장 받기, 사진 인증 등 방문객에게 숙제처럼 떠넘기는 곳들도 많다"며 "새로운 경험 제공이라는 팝업스토어의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하고 스토리텔링 한 방울을 추가하면 소비자에게 정말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영 연세대 경영학부 교수는 "성수동 팝업스토어는 아직까지 청년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며 "중·장년층이 열광할 만한 희소한 경험과 제품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확장성을 더욱 키울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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