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현직 판사가 책을 내는 건 이젠 뭐 특별한 일도 아니다. 나 역시 책을 낸 탓에 출판계를 조금 알게 됐는데 이 업계는 언제 봐도 경이롭다. 사람들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책을 안 사는데도 출판사는 엄청 많고, 1년에 발간되는 책도 수만 종을 넘는다. 도대체 다들 어떻게 먹고사는지 궁금하다. 업계에 대한 놀라움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출판인들을 존경하게 됐는데, 희한한 건 높아지는 경외심만큼 안쓰러움도 커진다는 점이다. 이들은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엄청 똑똑하지만 그 지식이 정작 자기 경제에는 별 도움이 안 되고, 그렇게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그 수단이 도무지 읽히지 않는 책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미련퉁이들이다.
출판인들은 베스트셀러의 기준을 얼마로 잡을까. 대략 1만 부 정도다. 장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쇄는 1,000~3,000부 정도를 찍는다. 이걸 다 팔아도 초기 비용을 빼면 남는 게 없다. 2쇄부터 조금씩 이윤을 남긴다. 실정이 이러하니 출판인들의 꿈은 1년 안에 2쇄를 찍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안 팔리는 책은 결국 절판되고, 창고 비용마저 버거워질 즈음 파쇄된다. 출판인들이 나무에게 미안해하는 순간이다.
절도를 밥 먹듯 하며 교도소를 들락거린 피고인이 있었다. 이번에도 식당에서 55만 원을 훔쳤다. 상습범이라 법정형이 징역 2년 이상이다. 판사가 정상참작감경을 해서 형을 깎아도 감옥살이 1년은 피할 수 없다. 이 정도 전과자면 법도 재판도 선수다. 그런데 이 피고인이 정신감정을 해 달라는 등 억지를 부렸다. 그가 쓴 반성문이다.
"9살 때 부모님이 헤어지고 친할머니 댁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소년원과 교도소를 오가는 동안 가족들은 연락 한번 없었고, 어느새 30대 중반이 됐습니다. 그러다 어머니를 최근에야 만났습니다. 가족의 사랑이란 걸 받아본 적 없는 저는 어머니의 보살핌이 얼떨떨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항상 남의 것을 훔치던 저는 이번에도 나쁜 짓을 했고, 당연히 어머니가 실망해서 떠나실 줄 알았습니다. 또 혼자 남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가 변호사도 선임해 주고 합의도 해 줬습니다. 이제 제게도 제 편이 있습니다. 기분이 이상하고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파 죽을 것만 같습니다."
반성문을 읽고 피고인을 바로 석방해 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외를 봉쇄한 법이 이렇게 엉터리다.
형사재판장을 가장 괴롭히는 게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재범이라 답한다. 재범, 즉 갱생불능은 책으로 치면 절판 같은 상황이다. 건전한 사회복귀의 기대를 접는 순간이다. 절판되는 책 중에 좋은 책이 많듯, 교도소에서 끝장나는 인생 중에도 좋은 사람이 많다. 누가 책을 살리는가, 눈 밝은 독자다. 누가 전과자를 구하는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는 선한 이웃이다. 사람을 중쇄하기 위해 필요한 1쇄의 최소한의 독자는 몇 명일까. 한 명이다. 주변의 한 사람만 애정을 쏟아도 사람은 나쁜 길로 빠질 수 없다.
마쓰다 나오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는 부상으로 유도선수 생활을 접은 구로사와 고코로가 만화 출판사에 입사하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은 작품이다. 편집자 고코로의 좌우명은 '자타공영(自他共榮), 정력선용(精力善用)', 목표는 '중판출래(重版出來)'다.
바라보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 사람은 별이다. 읽는 이가 있는 한 책도 역시 별이다. 책도 사람도 한 번 더 빛날 기회를 주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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