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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김좌진·윤동주… 그날의 함성 들리는 듯

입력
2024.02.27 17: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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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의미 되새기는 여행지

김좌진 장군을 기리는 홍성 백야기념관에 청산리전투에 관한 전시와 함께 당시 사용한 태극기가 걸려 있다. 최흥수 기자

김좌진 장군을 기리는 홍성 백야기념관에 청산리전투에 관한 전시와 함께 당시 사용한 태극기가 걸려 있다. 최흥수 기자

105주년 삼일절이 코앞이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천안 독립기념관은 상징적 장소다. 1919년 3월 국권 회복과 민족 자존을 위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지역을 가리지 않았고, 때문에 전국 곳곳에 그 정신을 기리는 유적이 흩어져 있다. 3월 봄나들이에 그날의 의미를 되새길 장소 하나쯤 포함하면 어떨까.

영화 같은 삶, 박열과 후미코 이야기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박열은 1926년 2월 도쿄에서 열린 대역사건 공판에서 조선 예복 차림으로 법정에 출두해 전혀 주눅들지 않고 준엄하게 일본인 판사를 꾸짖으며 조롱했다. 영화 '박열'에 묘사된 그대로다.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 영화 '박열' 포스터가 걸려 있다. 최흥수 기자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 영화 '박열' 포스터가 걸려 있다. 최흥수 기자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 한복 차림으로 일제의 법정에 출두한 박열과 후미코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최흥수 기자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 한복 차림으로 일제의 법정에 출두한 박열과 후미코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최흥수 기자

고향인 문경 마성면 산기슭에 ‘박열의사기념관’이 있다. 전시의 상당 부분은 그와 옥중 결혼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에 할애하고 있다. 박열과 후미코는 1923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는다. 후미코는 1926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천황의 은사장을 찢어버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한 뜻에 따라 박열의 형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미코의 묘소는 기념관 옆 언덕에 있다.

광복과 함께 출소한 박열은 한국전쟁 때 납북돼 1974년 숨진 후 북한 애국열사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기념관은 2012년 세워졌다. 문경새재와 단산 모노레일, 고모산성, 문경오미자터널 등 주변에 여러 관광지가 있다.

청산리대첩 김좌진 장군의 백야기념관

김좌진 장군은 3·1운동 때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올랐다.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함께 지린성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10여 차례 교전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군도 100여 명이 사망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최고의 전과로 기록되는 청산리대첩이다.

홍성 백야기념관에 청산리대첩 장면을 묘사한 동판 작품이 걸려 있다. 최흥수 기자

홍성 백야기념관에 청산리대첩 장면을 묘사한 동판 작품이 걸려 있다. 최흥수 기자


홍성 갈산면 생가에 백야기념관이 있다. ‘백야’는 장군이 18세부터 사용한 호로, 백의민족의 심신을 강하게 단련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안동 김씨 부호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일찍 신문학을 깨쳐 17세에 집안 노비를 해방시키고 땅을 분배했다.

생가 대청마루에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청백리 집안으로 800년을 이어왔다는 의미다. 처마에 걸린 ‘단장지통(斷腸之痛)’은 찬 서리 내리는 타국 땅에서 창자가 끊어질 듯 서글프고 아픈 마음을 읊은 시다. 스님으로서 독립운동의 길을 택한 만해 한용운 생가도 홍성에 있다.

섬진강 끝자락에서 만나는 윤동주

섬진강이 남해 바다와 만나는 광양 망덕포구에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이 있다. 긴 이름만큼 사연이 복잡하다.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투옥되기 전인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내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출간을 미뤘다. 행간에 서린 저항과 독립 의지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3부의 필사본을 남겼다. 한 부는 자신이 간직하고, 또 한 부는 은사에게 맡겼다. 나머지 한 부는 연희전문학교 후배인 정병욱에게 부탁했다.

광양 망덕포구 도로변에 위치한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 정병욱 부친이 양조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최흥수 기자

광양 망덕포구 도로변에 위치한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 정병욱 부친이 양조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최흥수 기자


광양 망덕포구 제방에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최흥수 기자

광양 망덕포구 제방에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최흥수 기자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이 위치한 망덕포구에서 바로 앞 배알도까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다. 최흥수 기자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이 위치한 망덕포구에서 바로 앞 배알도까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다. 최흥수 기자

그러나 정병욱도 1944년 징용에 끌려가며 원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졌다. 모친은 원고를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양조장으로 지은 이 집 마루 밑에 숨겼다. 무사 귀환한 정병욱은 1948년 윤동주의 유고 31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한다.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지 3년이 지나서야 섬진강 끝자락 양조장 마룻바닥에 잠자고 있던 그의 시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현재 가옥 앞 방파제에는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그린 조형물이 설치돼 있고, 공원으로 조성된 바로 앞 배알도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보행교가 놓여 있다.


독립운동가만 89명... 완도의 작은 섬 소안도

완도 소안도는 '항일운동의 성지’임을 자부하는 섬이다. 도로변엔 무궁화 가로수가 심겨 있고,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려 있다. 잘록한 섬 허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있다. 일제는 1910년 이전에 소안도에 대한 토지 조사를 마치고 왕가의 후손인 이기용이라는 인물에게 땅을 넘겼다. 이에 맞서 주민들은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13년 가까이 서울까지 오가며 법정 싸움을 벌인 끝에 최종 승소했다. 이 과정에서 6,000여 주민 중 800여 명이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주민들이 설립한 사립소안학교 자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최흥수 기자

주민들이 설립한 사립소안학교 자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최흥수 기자


소안도 해안도로 조형물 뒤로 당사도가 보인다. 해상 의병이 눈엣가시 같던 등대를 파괴한 항일의 섬이다.

소안도 해안도로 조형물 뒤로 당사도가 보인다. 해상 의병이 눈엣가시 같던 등대를 파괴한 항일의 섬이다.


소안도까지는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 세 선박이 번갈아 운항한다. 최흥수 기자

소안도까지는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 세 선박이 번갈아 운항한다. 최흥수 기자


몽돌해변으로 이름난 소안도 미라리해수욕장. 최흥수 기자

몽돌해변으로 이름난 소안도 미라리해수욕장. 최흥수 기자


주민들은 모든 원인이 못 배워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라 자각하고, 가구당 70원을 모금해 1923년 신식 교육기관인 사립소안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자리 잡았고,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항일운동으로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른다.

소안도 가는 배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대한·민국·만세호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 중간에 거치는 노화도는 고산 윤선도 유적이 있는 보길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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