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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47% "의미도 없는 일한 적 있다"

입력
2024.02.27 10:00
수정
2024.02.27 10:1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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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노동: ②비효율에 갇힌 한국 직장인]
본보·일하는시민연구소 300명 설문
"일 통해 자아실현?"... 52% "아니오"
어리고, 직급 낮을수록 눈치 많이 봐
"뿌리 내린 경직적 절차·제도가 문제"

야근하는 노동자. 박시몬 기자

야근하는 노동자. 박시몬 기자


"상사가 야근하니까, 신입인 저도 그냥 자리 지키는 거죠. 할 일 없어서 그냥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많아요."

(대기업 직원 A씨)

"원본 서류 만들고, 서류에 수십 개 도장을 박고, 또 스캔본 만들어 보관하고. 쓸데없는 업무가 끊이질 않아요."

(군무원 B씨)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 직장인은 여전히 '길게' 일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집계로 본 2022년 기준 연간 근로시간은 1,901시간. 주52시간제 시행(2018년)을 계기로 일하는 시간이 극적으로 줄었음에도, 여전히 OECD 평균(1,752시간)보다 149시간을 더 일한다. 독일(1,341시간)과 비교하면 무려 560시간 차이, 하루 8시간 근로 환산시 1년에 70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너무 당연한 일처럼, 직장에서 보내고 있는 걸까?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바쁜 척하기' 또는 '무의미한 업무'를 가리키는 '가짜노동’이 만성적 장시간 근로를 유발한다고 진단했다. 사람을 직장에 잡아두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업무인 가짜노동 탓에, 직장인들이 무의미한 장시간 근로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실제 그럴까? 한국일보는 일하는시민연구소와 설문조사를 통해 실제 가짜노동이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들여다봤다. 본보는 가짜노동의 개념을 한국의 실정에 맞춰 △눈치노동 △허식노동 △의전노동 △의례노동이라는 네 개 범주로 나눈 뒤, 직장인 300명에게 가짜노동을 경험한 적 있는지 물었다. 설문조사는 지난달 14~16일 진행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 ±5.66%포인트다.

저연차 노동자, 비효율 업무 매달려

한국일보·일하는시민연구소 설문조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한국일보·일하는시민연구소 설문조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먼저 '현재 하는 일에 만족도가 높은가’를 물었다. 응답자의 33.7%(전혀 그렇지 않다 6.0%·그렇지 않다 27.7%)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거나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엔 51.6%(전혀 그렇지 않다 10.3%·그렇지 않다 41.3%)가 부정적이었다.

자기 업무에 '가짜노동이 포함돼 있다'고 답한 직장인도 절반에 달했다. '일의 효율 및 본질과 무관한 업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47.3%에 달했고,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 이들도 48.7%나 됐다.

직장인의 둘 중 한 명은 '눈치노동'을 경험한 적 있다는 점도 확인됐다. '쓸모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업무를 부풀려 말하거나 바빠 보이는 척을 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47.0%의 직장인이 긍정을 표했다.

나이가 어릴수록 눈치노동 경험 비중은 높아졌다. 20~34세 응답자의 58.3%가 눈치노동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다. 반면 35~49세는 44.3%로, 50~59세는 36.8%로 비율이 점차 내려갔다. 직급 별로도 차이는 드러났다. 실무자의 50.8%는 눈치노동을 '경험했다'고 답했지만 중간관리자는 55.0%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관리자 직급은 73.3%가 '눈치노동을 겪지 않았다'는 문항을 택했다.

형식을 맞추기 위한 불필요한 노동인 '허식노동'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났다. '상사 혹은 거래처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양식이나 발표(프레렌테이션) 자료 등을 꾸미고 수정하느라 정작 해야 할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 적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44.0%나 되는 응답자가 "그렇다"는 답을 내놨다. 허식노동 역시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응답자들에게서 더 많은 긍정의 답이 나왔다. 20~34세 51.8%, 35~49세 45.4%, 50~59세 33.7% 등 나이를 먹을수록 비율이 내려갔다.

한국일보·일하는시민연구소 설문조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한국일보·일하는시민연구소 설문조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사내 인간관계에 허비되는 '의전노동', 관성적으로 답습되는 '의례노동'을 경험한 직장인들도 각각 절반에 달했다. '사내 회식, 흡연실 가기 등에 가고 싶지 않지만 무리하게 참석'한 적 있는 직장인의 비중은 과반인 50.3%였다. '정기 회의, 세미나 등 업무 효율과 무관하지만 관성적으로, 의례적으로 진행하는 활동들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절반 이상(54.7%)이 "그렇다"고 답했다.

"조직문화 바뀌어야 가짜노동 근절"

19일 밤 서울 중구의 한 빌딩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다. 박시몬 기자

19일 밤 서울 중구의 한 빌딩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다. 박시몬 기자

본보 설문에 응한 직장인은 가짜노동의 원인을 ①오랜 시간 굳어진 비효율적인 절차와 제도(46.3%)에서 찾았다. 이어서 ②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문화(29.0%) ③성과주의에 따른 의무감(13.3%) ④하향식 인사 평가로 인한 보여주기식 업무(9.7%)도 원인으로 지적됐다. 결국 '정말 필요한 일인지'에 대한 성찰 없이 반복된 비효율이 수많은 가짜노동을 낳은 셈이다.

직장인들은 절차와 제도가 문제인 만큼, 해결 방안 역시 조직문화 개선에 있다고 평가했다. 비효율적 노동(가짜노동)을 없애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①기업 내 조직문화 개선(35.3%)을 해법으로 꼽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②최고경영진의 의지와 결단(20.3%) ③상급자의 인식 개선(17.3%) ④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13.7%) ⑤법·제도 등 구조적 변화(7.3%) ⑥개별 구성원의 태도 변화(4.3%)가 꼽혔다.

설문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일하는시민연구소 김종진 소장은 개인, 조직, 사회가 함께 변해야 가짜노동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개별 근로자들이 가짜노동을 없애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기업 단위에서 조직문화를 개선하고, 정부·국회 차원에서 근로시간 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적·제도적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일하는시민연구소 '가짜노동' 인식과 실태

한국일보와 일하는시민연구소는 '가짜노동'에 대한 한국 직장인의 인식과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2024년 1월 14~16일 3일간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대상: 직장인 임금노동자(시간제, 일용직 제외)
조사 방법: 온라인 설문조사. 표본오차 ±5.66%포인트(95% 신뢰구간)
조사 표본: 취업자 대비 비례할당 표본 구성

전유진 기자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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