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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 2시간 반을 '가짜노동'에 허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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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노동 현장에 몸담았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끝내고 나면, 문득 물음표가 떠오르지 않나요? 상사 보고를 위해 30분을 기다렸고, '일하는 티'가 듬뿍 담긴 보고서를 쓰는 데 2시간을 보냈고, 밤 늦게까지 팀원들과 술을 마셨고···. 일다운 일을 한, '진짜 노동'을 한 건 몇 시간일까요. 그래서 한국일보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가짜 노동'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당신의 삶을 흔드는 그 비효율성에서 노동자 모두가 해방되기 위한 길을 모색해 봅니다.
①초등교사 김서희(이하 모든 이름 가명·41) ②공무원 이예진(26) ③제조업 종사자 김민자(57) ④금융권 직원 양준호(27) ⑤공무원 이주호(36) ⑥사회복지사 강민준(26) ⑦공공기관 직원 김서문(27) ⑧제약업체 직원 임지선(33)
세대·직업·지역·소득·자산 등 사회경제적 배경이 완전히 다른 8명에게 한국일보가 '솔직하게 답해 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물어봤다.
"최근 일주일간 당신이 했던 일 중,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되는 일을 한 시간은 얼마였나요?
8명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다. 그러나 지난달 11일부터 일주일간 자신만의 근무일지를 작성해 봤더니 중간중간 의미 없는 일을 하는 빈틈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이 무의미한 일을 했다고 답한 시간을 모두 합하니 6,345분. 한 사람당 평균 793분(13.2시간)을 '없어도 그만'인 일에 몰두했다는 뜻이다. 8명이 이 기간 일한 시간(시간 외 근무 제외)은 총 2만600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과의 약 30%를 '쓸데없는 일'에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5시쯤 할 일을 모두 마치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그냥 집에 가고 싶죠. 하지만 오후 6시에도 8시에도, 회사 주차장엔 여전히 많은 차가 있어요. 절대 퇴근할 분위기가 아니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동시간 최상위권인 한국의 직장 어느 곳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 같겠지만, 이 얘기는 덴마크 회사 홍보팀에서 일하는 30대 직원이 '가짜노동' 저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고백이다.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또는 '노동과 유사하지만 무의미한 업무'라고 이 책 저자들이 정의하는 '가짜노동'은, 사회적 허례허식이 거의 없을 것 같은 북유럽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란 얘기다. 책 공동저자인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인간은 시간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 분주하게 만들 방법을 만들었다"며 "실질적인 일과 거리가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 가짜노동을 하느라 더 바빠졌다"고 말했다.
덴마크가 이럴진대, 남들 눈치를 많이 봐야 하고 형식에 집착한 '보이는 노동'을 여전히 강요당하는 한국의 현실은 더 심하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일보는 약 한 달간 수십 명의 직장인을 심층인터뷰하고 이 중 8명에게 세밀한 근무일지를 쓰도록 했다. 30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도 진행했다.
결론은 어땠을까? 예상대로 한국사회에서 가짜노동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했다. 먼저 △쓸모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 일을 일부러 만들었고(눈치노동) △형식과 시스템에 맞추기 위한 일(허식노동)에 매진했다. 때로는 △오로지 윗사람만을 위한 일(의전노동)에 시간을 쏟아붓기도 했고 △관성적으로 해왔지만 누구도 효용을 느끼지 못하는 일(의례노동)을 하느라 야근을 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짜노동을 하고 있는지, 가장 먼저 어느 구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주호(가명·36)씨의 이야기로 시작해본다.
"구청장실에 딸린 비서실엔 검은색 소파가 있어요. 거기 가면 대면 보고를 기다리는 과장님들 5명정도가 앉아 있죠. 뭘 하냐고요? 멍때리면서 기다립니다. 잡담 나누고, 100번 읽은 보고서류를 읽고 또 읽고 반복하는 거죠."
주호씨는 매일 오전 9시마다 반복되는 풍경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구청에서 개별 사업을 담당하는 주무관. 개별 사업 담당자는 복지관, 교통, 일자리, 장애인 등 구체적인 사업을 맡은 직원이다. 하지만 주호씨는 자기 사업과 무관한 업무에, 너무도 많은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구청장님 대면보고 준비' 업무다.
이 구청은 '구청장님과의 만남 기회'를 순번제로 운영한다. 매일 오전 9시 '대면보고 예약받습니다'라는 공지가 내려오면, 각 팀 담당자들이 빠르게 비서실로 '오픈런' 전화를 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중요한 보고가 있는 팀은 예약순서와 상관없이 순번이 앞으로 당겨져요. 상황에 따라 순번이 바뀌는 일이 허다하죠. 그러면 뒤에 있는 팀은 무작정 사무실에서 대기해요. 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시간이죠." 대기 시간은 짧게는 30분, 길게는 하루종일이다.
대기 시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호씨의 업무일지를 보면 '대면보고 준비' 항목이 자주 등장한다. 대면보고 과정에서 구청장이 던질 법한 질문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주호씨뿐 아니라 팀 전체가 대면보고 2, 3일 전부터 구청장의 질문을 준비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뭘 물어볼지 예측할 수 없잖아요. 사업과 관련 없는 질문을 해도 즉각 답을 못 하면 안 되니까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거죠." 구청장 대면보고에 투입되는 평균 시간을 얘기해 달라는 질문에, 주호씨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비효율이 난무하지만, 구청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인사권을 쥔 구청장과의 대면보고에 목숨을 건다고 한다. 주호씨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노동입니다.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노동이죠. 예상질문 준비도 똑같아요. 무능력해 보일까 봐 하는 거죠." 주호씨는 구청장 대면보고 준비에만 이틀 동안 3시간 30분을 썼다.
눈치노동은 공공조직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대기업 직원 정모(26)씨도 마케팅 업무를 하던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위에서 '외국 회사가 하고 있는 특정 업무 현황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고할 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요? 뭔가 하는 것처럼 지어서 보고서를 쓰는 거죠. 이걸 위한 노동시간, 무시 못 해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쉰 정씨가 말을 이었다. "무능력해 보이면 안 되니까 창작하는 거예요. 기존에 있는 걸 부풀리기도 하죠." 조작 행태가 들키진 않을까? "아뇨, 정작 윗선도 보고서 안 봐요."
공연기획사에 근무하는 이모(26)씨도 각종 눈치노동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 이씨의 업무는 공연에 활용되는 영상과 무대를 디자인하는 일. 통상 봄부터 가을은 공연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야외 공연이 없는 겨울은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이 회사의 눈치노동은 공연 비성수기에 이뤄진다. "상사가 이상한 아이디어를 툭 던져요. 이거 키워서 프로젝트하자고요. 누가 봐도 의미 없는 아이디어고 제 일과는 무관한 기획업무예요. 근데 저희는 파워포인트 만들고 기획안 쓰느라 퇴근을 못 해요." 굳이 그런 일을 시키는 이유를 묻자 이씨가 답했다. "노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시키는 거죠." 실제로 이씨가 기획안을 완성해도 그 누구도 검토를 안 한다고 한다.
한국일보와 일하는시민연구소는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달 14~16일 직장인 300명(시간제, 일용직 제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 ±5.66%포인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이씨처럼 '쓸모 있어 보이려 하는 불필요한 노동(눈치노동)'을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한다고 답한 이는 29.3%에 달했다. 대표적인 눈치노동인 '해야 할 업무가 끝났지만 일하는 척 남아 있었다'는 말에 직장인 51.3%(그렇다, 매우 그렇다)가 공감을 표했고, '눈치가 보여 중요도가 떨어지는 프로젝트를 억지로 추진한 적 있냐'는 질문에도 33.7%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엔 지방직 공무원 이예진(가명·27)씨 얘기다. 그는 다른 종류의 '가짜노동' 사례를 들려줬다. 오로지 윗사람만 빼고는 누구도 효용을 느끼지 못하는 의전노동. 아니 심지어 윗사람마저도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근무일지를 보여주며 '부서 인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공무원들은 통상 근무지에서 2년 6개월을 채워요. 그러다 오래 일한 직원이 떠나면 동료들이 해당 직원 새 발령지로 우르르 몰려가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죠." 그게 부서 인사다.
"민원 응대할 사람만 빼고 전 직원이 출동해요." 예진씨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올해는 행정차량도 2대나 동원됐다고 한다. "4명의 직원을 위해 두 시간을 썼죠. 거기다 저희 팀에 새로 오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전 동료들도 따로 인사를 오기 때문에 그걸 응대하는 데 또 시간을 써야 하죠." 예진씨는 바보 같은 장면도 목격했다. "팀원 중 한 분이 1월에 왔어요. 이번에 다른 근무지로 떠나는 직원과 일면식도 없죠. 근데도 음료수를 사들고 부서 인사를 갔어요. 가서 '음료수 맛있네요' 뭐 이런 얘기만 하다 돌아왔다니까요. 웃기죠?" 예진씨는 부서 인사에 이틀간 4시간을 버렸다.
의전노동은 사기업도 만만치 않다. 술자리, 단합대회 등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최근에는 '업무'로 포장된 의전노동이 적지 않다. 제조업체 직원 김민자(가명· 57)씨는 매일같이 사장에게 제출하는 '업무일지'를 따로 작성하고 있다고 했다. "설비 개수, 생산율, 오더 잔량 등을 정리해 보고하는 거죠." 당연히 사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민자씨는 분개했다. "회사 시스템에 다 있는 내용이에요! 그쪽이 더 잘 정리돼 있다니까요!"
이해가 되지 않아 조금 더 캐물었다. "저희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회사 실적 내용 보고받기를 좋아하세요. 이미 다 알고 계신 내용인데도 말이죠. 저희는 사장님이 좋아할 말들을 미리 정리하고, 시스템상에 있는 수치들을 거기에 맞춰 다시 정리하는 거예요." 업무적 효용이 '0'에 가까운, 사장의 기분 하나만을 위한 업무인 셈이다. 혹시 사장이 컴퓨터를 못 쓰는 사람이어서 그러나? 민자씨는 헛웃음을 쳤다. "할 줄 아세요. 그냥 보고받는 걸 좋아하실 뿐." 직원들은 업무일지 때문에 중요한 일에 집중을 못 하지만, 사장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한국일보 설문조사에서 사내 친목(50.3%), 회사 행사(46.7%) 등 회사 및 상사를 위한 의전노동에 시간을 뺏기고 있다고 답한 직장인은 여전히 많았다. 업무 효율과 무관한, 의례적이고 관성적인 노동에 힘을 쏟고 있다는 직장인도 54.7%에 달했다. 공직사회나 민간기업 모두 불필요한 허례허식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정작 바뀐 건 없었고 직장인들은 여전히 의전에 시달리고 있다.
일을 하는 척 연기하는 '눈치노동' 외에도, 직장인들이 치를 떠는 가짜노동은 또 있다. 이번엔 서울의 한 비영리기관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강민준(가명· 26)씨의 사례다. 그는 한국일보가 부탁한 업무일지를 작성한 일주일 내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감기 몸살에 걸려 벌벌 떨려도, 퇴근도 미룬 채 꼭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2023년 사업평가보고서. 1년간 뭘 했는지 쓰는 거죠." 민준씨가 말했다. 보고서 작성에 그가 투자한 시간은 자그마치 3일. 상급자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는 시간은 제외하고 사흘이다.
민준씨는 평가서 작성 내내 의문이 드는 항목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환경변화대응'과 '가치대비전략과제대응' 항목. △환경변화대응에는 '사업을 진행하며 발생한 환경 변화에 따라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써야 했고, △가치대비전략과제대응에선 '소속 기관이 추구하는 가치에 맞게 사업을 진행했는지 여부를 설명'해야 했다. "이해돼요?" 민준씨가 먼저 물었다. 그는 "누구도 안 읽고, 이해도 안 되고, 쓸모없는 항목을 쓰느라 업무시간이 두 배로 뛰었다"고 강조했다.
공공기관 직원 김서문(가명·27)씨도 거들었다. 그는 기자와 만나자마자 공공기관의 불필요한 '양식 맞추기 놀이'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서문씨는 글씨체·글씨크기·들여쓰기 같은 정해진 양식은 그렇다 쳐도, 암암리에 존재하는 불문율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둘째 장 이상으로 넘어가는 보고서엔 어떤 빈칸도 있으면 안 된대요. 보기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러니 실무자들은 억지로 내용을 줄여 빈칸을 없애거나, 쓸데없는 그래프, 통계, 자료를 넣어야 해요." 그는 보고서 불문율을 지키는 데 쓰는 시간이 보고서 작성 시간의 거의 전부라고 단언했다.
실체는 없지만 '형식과 시스템'에 맞추기 위해 하는 일이 '허식노동'이다. 한국일보 설문조사에서 '실질적인 업무와 무관한 형식적 서류, 보고서, PPT 작성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한 직장인은 전체의 48%. 반대로 이런 허식노동이 필요하다고 답한 직장인은 29.3%에 불과했다. 절반 가까운 직장인들이 '허식노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만, 정작 그 필요성에 공감하는 직장인은 10명 중 3명도 채 되지 않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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