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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가해자보다 ‘너 때문’ 혼내던 부모님이 더 미워요

입력
2024.02.26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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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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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딸인 제게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무언가 잘할 때는 ‘이 정도로 되겠나’라고 나무라시고, 못할 때는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취업과 결혼 이후로도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행동에 불평하면 어릴 때는 “버릇없다”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연세가 드신 지금은 “능력 없다고 부모를 무시한다”고 말하십니다. 결국은 다 제 잘못이 되는 겁니다.

결혼 생활은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성실하고 다정한 데다 배울 점이 많은 남편, 건강하고 활발한 아이, 또 전적으로 존중해주시는 시부모님까지. 새로운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해외로 이직할 기회가 생기자, 두말하지 않고 찬성했습니다. 외국에서 지내며 거리를 두자 부모님은 서운해하시지만, 최소한의 연락만 하는 지금이 살면서 가장 편합니다.

그러자 기억 저편에서 애써 잊고 부정하던 어린 시절의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웃집 오빠들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던 일입니다. 당시 부모님은 나이가 비슷한 이웃집 부부와 가까이 지내며 밤에 어른들끼리만 놀러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문제는 아이들만 남겨진 상황을 틈타 이웃집 오빠들이 제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저와 달리 두 사람은 중·고등학생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어른만큼 키가 큰 오빠들이 무서웠습니다. 가뜩이나 두렵던 이들의 앞에서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자라면서 제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자 혼란스러웠습니다. 모든 게 제 잘못인 것 같았거든요. 성폭행 관련 뉴스에 어머니는 ‘여자가 헤프게 굴면 저런 일 생긴다’고 하셨고, 그때부터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가지 못해서 그런 일을 계속 당하게 된 것일까. 수치스럽고 스스로를 미워했습니다.

성범죄라는 인식을 못 하던 시절에는 ‘엄마 말을 안 들어서’ 받은 벌이라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감기에 걸리는 등 사소한 일에도 ‘엄마 말 안 들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작은 잘못에도 화가 풀릴 때까지 체벌하셨고, 자식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외면했습니다. 제 부정적인 감정을 더 큰 질책으로 덮어버리는 부모님 앞에서는 항상 죄인처럼 마음을 졸였습니다. 학교에서 체벌이 과해도, 친구와 다퉈도, 직장에서 억울한 일이 생겨도 일단 원인을 제게서 찾았고, 수치심을 과하게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부모님에 대한 미움이 커집니다. 힘든 일을 겪게 한 원인에 부모님의 잦은 밤 외출이 있기도 하지만, 두 분이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닌데도 더 밉고 원망스럽습니다. 왜 자식을 존중하지 못하고 항상 못난 자식 취급 했는지. 부모님은 ‘너도 자식 낳아보면 내 마음을 알 거다’라고 수시로 말씀하셨는데, 아이를 키워보니 이해는커녕 증오스럽습니다. 가능하다면 부모님을 이대로 보지 않은 채 살고 싶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걸까요.

정윤경(가명·42·주부)

윤경씨, 사연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 학대와 타인과의 비교에 시달린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려졌습니다. 부모님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엄포로 겁이 많고 소심한 편인 당신을 통제하려고 했죠. 성인이 된 이후로도 통제는 계속됐습니다. 용기 내어 자기감정을 털어놓더라도 호된 질책이나 체벌 같은 ‘나쁜 결과’로 돌아왔기에 윤경씨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면서 속으로 앓는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람에게는 정서적 독립이 필연적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통제의 경험이 계속되면 여기에서 벗어나는 일 자체가 죄책감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해외에서 지내며 부모로부터 제대로 독립하게 된 시점에 과거의 사건이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독립이라는 행위로 자신도 모르게 생긴 죄책감이 초등학생 시절 겪었던 일에 대한 자책을 떠올리게 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지금 윤경씨를 힘들게 하는 본질은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해소되지 않은 감정에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생활을 해나가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심적으로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문제의 근원을 살피기 위해선 당시 상황과 부모님과의 관계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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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트라우마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공포로 몸이 굳어 도망가기 어렵습니다. ‘내 잘못’이라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트라우마의 증상 중 하나입니다. 내 탓을 해야만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미리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은 통제감이 들고 안심이 되기 때문이죠. 윤경씨는 당신을 탓하고 책임을 돌리는 부모님의 양육 방식으로 이런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겁니다.

트라우마 자체보다 중요한 건 적절한 회복입니다. 정서적으로 지지받는 안전한 환경에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부모로부터 지지는커녕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덮어놓고 지내야 했습니다. 만약 다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면 윤경씨가 과거의 사건을 이유로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성적인 트라우마를 겪고, 회복도 하지 못한 당신이 자녀를 지킬 의무를 진 부모를 가해자보다 더 큰 원망의 상대로 삼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어린 윤경씨에게도, 또 지금도 당신의 부모님은 딸의 입장에서 분노하고 돌봐줄 것이라는 신뢰조차 주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만큼 감정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윤경씨는 성장 과정에서 주변에 자기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로부터 ‘무난하고 성실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내면은 늘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을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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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라도 자기의 솔직한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마주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감정을 털어놓고, 수용받는 경험을 쌓는 겁니다. 주변에 마땅한 상대가 없다면 감정 일기나 평소 좋아하시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해 보기를 권합니다. 부모 역할에 대한 ‘부모 교육’을 받아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책이나 강의 등을 통해 제대로 된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해 배우다 보면 부모님이 당신에게 채워주지 못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성장 환경으로 인해 자기감정을 회피해 온 윤경씨는 경계를 넘어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거절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잠깐 멈추고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싫은 사람이나 요구에는 선을 긋고 스스로를 보듬는 연습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대 윤경씨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존중받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본인을 존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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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의 연락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부모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려면 부모와의 관계로부터 형성됐던 부정적 기억과 감정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윤경씨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 부모님과 연을 끊더라도 오롯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살아갈 수 있고, 또 연락을 이어가더라도 관계의 선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성장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현재의 가족 관계를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가족은 없습니다. 당장은 문제가 없더라도 자녀가 자라며 사춘기를 맞이하는 등의 변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잘 대처하고, 새로운 가족을 잘 꾸려가기 위해서라도 원가족과 관련된 복잡한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와 과거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고, 또 부모가 된 윤경씨가 제 역할을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선순환이 될 겁니다.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윤경씨가 꾸린 지금의 가족이 당신에게 버팀목이 되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들과 함께 기른 내면의 힘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푸는 토대가 되어줄 것입니다. 윤경씨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 바로가기


정리=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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