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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 뛴 정비소 임대료에 짐 싸" 반짝 팝업에 밀려난 수십년 생업 [성수동의 빛과 그림자]

입력
2024.03.13 04:30
수정
2024.03.13 08:43
8면

<하>사라지는 자동차 정비의 메카
'정비의 메카'에서 '젊은 핫플'로 변한 성수동
5년 동안 임대료 87% 상승...서울서 가장 높아
"팝업 유치해드립니다" 부동산 영업도 활발
성동구청 꾸준한 노력에도 '역부족'

2월 27일 서울 성동구 연무장길. 문을 닫아 어둑한 공장가와 달리 상점가는 불을 밝게 켜 놓았다. 김예원 인턴기자

2월 27일 서울 성동구 연무장길. 문을 닫아 어둑한 공장가와 달리 상점가는 불을 밝게 켜 놓았다. 김예원 인턴기자


팝업 봤어요? 사람들 많이 오던가요?

김기원(57) A모터스 사장

새하얀 눈발이 날리던 지난달 5일 경기 동두천시 한 자동차 정비소. 거뭇한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김기원(57)씨가 물었다. "3주 동안 2만 명 가까이 몰린 걸로 안다"고 하니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해 11월 선양소주가 팝업 스토어 '플롭 선양'을 열었던 서울 성동구 성수동2가 271-26번지. 바로 그 자리에서 김씨는 13년 동안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다. 마장동에서 정비공장 직원으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차린 첫 사업장이었다.

김씨가 반평생을 보낸 성동구를 떠나 이곳 동두천에 둥지를 튼 건 계약이 끝난 지난해 4월이다. 그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옮겨왔다"면서 울상을 지었다. 계약 종료까지 6개월을 앞두고 땅 주인은 김씨에게 한 달 임대료로 3,700만 원을 요구했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직전 임대료(1,500만 원)의 두 배 이상 오른다면 적자를 피하기 어려웠다. 결국 정든 정비소를 제 손으로 허물었다. "자부심을 갖고 이 일을 해 왔는데… 정말 회의감을 느껴요."


김기원씨가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던 자리의 지난해 9월 전경. '팝업 스토어'라고 쓰인 현수막이 붙어있다. 네이버 지도 캡처

김기원씨가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던 자리의 지난해 9월 전경. '팝업 스토어'라고 쓰인 현수막이 붙어있다. 네이버 지도 캡처


김기원씨가 운영하던 정비소의 지난달 27일 모습. 김예원 인턴기자

김기원씨가 운영하던 정비소의 지난달 27일 모습. 김예원 인턴기자


성수동 임대료 상승치, 서울시 평균의 네 배보다 높았다

강성헌(63)씨가 운영하던 서울 성동구 B모터스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김예원 인턴기자

강성헌(63)씨가 운영하던 서울 성동구 B모터스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김예원 인턴기자


성수동은 '서울 1호 공업단지'였다. "아침에 새하얀 셔츠를 입고 나가면 퇴근할 때쯤엔 옷깃에 공장 먼지가 수북하게 앉아 새까맣게 변했다니까요." 성수동 45년 토박이이자 B모터스 사장인 강성헌(63)씨의 말이다. 그 또한 말단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성수동에 정비소를 차렸다.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여름휴가를 떠난 직원 대신 당직을 자청하며 사업 확장에 구슬땀을 흘렸다. 그런 강씨도 1,600만 원이던 임대료를 5,000만 원까지 올리겠다는 땅 주인의 일방적 통보에 짐을 싸야 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이들이 알던 '회색 도시' 성수동은 날마다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무신사 같은 이름이 알려진 기업의 사무실과 주말마다 방문객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빵집·카페들이 속속 들어서면서다. 팝업 스토어는 열었다 하면 문전성시는 기본. 반면 수십 년 동안 '자동차 정비의 메카 성수동'을 일궜던 정비소는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원인은 성수동이 '핫플'로 떠오르면서 다락같이 오른 임대료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2018년 3분기 대비 2023년 3분기 성동구의 3.3㎡(1평)당 환산 임대료는 87.44% 뛰었다. 25개 자치구 중 가장 높은 데다 서울시 전체의 평균 환산 임대료 상승치(19.82%)의 네 배도 넘는 수준이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버텨도, 옮겨도... 앞길 막막한 자동차 정비소

정성일(58)씨가 정비소를 개업하던 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최현빈 기자

정성일(58)씨가 정비소를 개업하던 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최현빈 기자


선택지는 두 가지다. 성수동에 남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C모터스 사장 정성일(58)씨는 '버틴' 케이스다. 20년 동안 임대료를 거의 안 올리던 '천사' 건물주가 돌연 한 달에 8,000만 원을 달라 했다. 옥신각신한 끝에 기존보다 2,000만 원 올린 3,300만 원으로 1년 재계약에 합의했다. 그러나 최근 정씨 정비소 사무실엔 '내용 증명'이 날아들고 있다. 건물주 쪽에서 법적 다툼을 고려하고 있다는 뜻이다.

6월 계약 만료를 앞둔 정씨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교외 지역으로 옮겨본들 손님의 발걸음도 끊길 게 뻔할까 걱정이다. A모터스 김기원씨는 "동두천으로 이사 오면서 여섯 명이었던 직원을 절반으로 줄였지만 손님도 같이 줄어 매출은 내리막"이라고 털어놨다. 정씨는 "서울에서 쫓겨나면 여기서 만든 거래처들이라든가 단골손님들이 그곳까지 찾아오겠냐"면서 "21년 동안 이 일을 했지만 요즘은 자신감도 의욕도 없다"면서 불안해했다.

다른 업종으로 눈을 돌려봐도 사정은 같았다. 성수동에서 10년 넘게 페인트 도장 가게를 운영한 60대 김모씨는 "건물주가 요구해 월 임대료를 400만 원에서 600만 원까지 올려줬다"면서 "오며가며 얼굴 터 놓은 사장들도 최근엔 다들 가게를 빼는 추세더라"고 말했다. 공구가게 사장 서모씨(55)도 "처음 들어올 때 시세가 180만 원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300만 원을 더 주고 있다"면서 "매출은 그때보다 오히려 줄고 있다"고 토로했다.


'팝업' 뜻처럼 갑자기 나타난 '기획 부동산'

성수동을 거닐다 보면 오래된 창고나 공장 등에 '팝업·대관 문의' 현수막이 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성수동을 거닐다 보면 오래된 창고나 공장 등에 '팝업·대관 문의' 현수막이 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특히 자동차 정비소가 둥지 내몰림 현상(젠트리피케이션)에 취약한 데엔 이유가 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상임법)의 울타리 안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임대료 증액 청구 상한요율(5%) 적용을 받지 못한다. 서울시 기준으로 환산보증금(보증금+임대료x100) 9억 원을 초과하는 계약은 보호 대상이 아니어서다. 계약갱신요구권 역시 첫 계약 후 10년 동안 유효한데 이 기한을 이미 넘긴 곳이 많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성수동에 뛰어든 이들이 있다. 원주민들의 표현을 빌리면 '기획 부동산'이다. 이들은 ①거리를 둘러보면서 영업하기 적당해 보이는 땅을 찾고 ②기존 입점 업체의 계약 만료 일자를 확인한 뒤 ③땅 주인이나 건물주에게 접촉한다. 그런 뒤 기업들의 팝업 스토어나 다른 임차인을 유치함으로써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겨간다. 최근 사업을 접은 또 다른 정비소 사장은 "99% 그런 식으로 가게가 넘어간다"고 귀띔했다.


약 10년간 구청에서 관리했지만... "결국 시간문제"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성수동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토지건물 거래 플랫폼 '밸류맵'에 따르면 성동구의 단독주택과 업무·상업시설 3.3㎡(1평)당 가격(평단가)는 2015년(2,960만 원)부터 지난해 1억608만 원으로 계속 오르고 있다.

땅값을 밀어올리는 주범은 역시 성수동, 그 중에서도 오래된 공장이나 정비소가 많은 성수동2가였다. 밸류맵이 성수동2가의 업무·상업시설 평단가를 분석해보니 2015년 2,851만 원에서 2023년 1억 3,734만 원으로 400% 넘게 증가했다. 부동산 경기에 따라 거래건수는 해마다 23개~74개까지 들쑥날쑥했지만, 상승세가 꺾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청의 대응이 미적지근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성동구청은 2015년 전국 최초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을 내놓았다. '성수동 지속가능발전구역'을 기존 약 26만㎡에서 225만㎡까지 늘리는 내용을 뼈대로 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정책 2.0'도 추진 중이다. 이 구역 내에선 건물주(임대인)·임차인·성동구 간 상생 협약 체결이 권장된다.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의 입점도 제한할 예정이다. 성동구청에 따르면 3월 기준으로 505개의 상생 협약이 체결됐다.

다만 이는 말 그대로 '권장'에 불과하고 법적 구속력이 없어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 이미 자리 잡고 있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내쫓을 수도 없고 어느 정도 규모의 어떤 업종까지 제한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짧은 기간만 영업한다는 특성상 팝업 스토어도 제재 대상에 들긴 어렵다. 3년 전 어느 대기업과 성수동 팝업 스토어를 함께 진행한 적 있는 공인중개사 A씨는 "성수동에 팝업을 여는 기업들이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어서 임대료와 땅값은 계속 오를 것"이라며 "기존 공장이나 카센터가 밀려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다.

동두천= 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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