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40> 탄자니아 올두바이 협곡 유적
‘사람은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났을까?’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 던지게 되는 이 질문. 이에 대한 답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탄자니아 북부 올두바이 협곡(Olduvai Gorge) 유적이다.
올두바이 지역 호숫가 유적들에서 발견된 고인류 화석과 석기 문화는 인류 진화 연구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오래된 유물들이 이곳 거대한 리프트밸리(Rift Valley·동아프리카 지구대)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바람에 인류사를 수십 번이나 새로 써야 했다. 다윈에서 출발한 인류 기원 논쟁이 올두바이 유적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두바이 협곡 유적지 가는 길
고고학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상당히 흥분되는 여정이다. 일단 출발 도시인 아루샤(Arusha)는 아프리카 최고봉(最高峯) 킬리만자로 등반을 위한 거점지다. 동아프리카인들에게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는 킬리만자로를 방문하기 위한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아루샤에서 출발해 ‘초대형 화산 분화구’인 응고롱고로 분화구(Ngorongoro Crater), 자연 다큐멘터리에 자주 등장하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입구도 지난다.
차를 타고 붉은 흙먼지를 펄펄 날리며 달리다 보면, 기린들이 사바나 초원 나무 사이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한참을 가야만 하얀 들꽃 가득한 평원 끝 너머 올두바이 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에서 100여 m 아래 계곡 바닥에는 거대한 탑 모양의 지형이 솟아 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원시시대로 들어온 착각이 들게 한다.
리키 가족과 올두바이 협곡
독일의 한 나비학자가 1911년에 이 유적을 처음 탐사했지만, 오늘날의 명성을 만든 주역은 바로 루이스 리키(1903~1972)와 그의 가족이다. 그래서 리키 가족의 이야기는 곧 올두바이 협곡의 역사다. 루이스 리키와 그의 부인 메리 리키, 아들 리처드, 그리고 며느리 미브는 모두 고고학자ㆍ인류학자다. 또 루이스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령이었던 케냐 키쿠유족(Kikuyu族) 지역의 선교사였다. 루이스는 1903년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 13세 되는 해에 동물 화석을 발견하고 고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 중, 1925년부터 아프리카 고고학과 고생물학에 심취하게 된다.
루이스가 올두바이 고르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건 ‘인류 기원지가 동아프리카일 것’이라는 가설이 당시로서는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두바이 계곡 사면에는 엄청나게 오래된 다른 색깔의 층들이 드러나 있었고, 인류와 가장 비슷한 형태인 침팬지나 고릴라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 또 후대의 것으로 판명되기는 했지만 사람의 뼈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
올두바이 고르지의 리키 캠프는 아프리카 고고학의 출발점이 됐다. 고인류학·영장류학에서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제인 구달(영국·1934~), 그리고 고릴라 연구의 권위자 다이앤 포시(미국·1932~1985)가 바로 이곳에서 루이스의 추천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 진화의 많은 지식이 리키 가족에 의해 잉태됐다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진잔트로푸스, 리키 가문의 아이콘
리키 가족을 학계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메리 리키가 1959년 올두바이 고르지에서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동아프리카의 인류’라는 의미) 화석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이 화석은 이제는 파란트로푸스(Paranthropus)라고 부르는데 그동안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Australopithecus boisei)라는 학명으로 알려진 화석이다. ‘보이세이’는 이 조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보이스재단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넓적한 얼굴과 정수리에 닭벼슬같이 생긴 뼈가 있어서 대단히 특이한데, 어금니도 매우 커서 별명이 ‘호두 까기'(nut cracker)였다. 1990년대 말 탄자니아 국립박물관 대형 금고 속에 보관된 이 인류 화석을 실제로 봤을 때의 놀라움은 잊히지 않는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괴팍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루이스의 걱정이 충분히 공감 가는 순간이었다.
이 화석의 발견은 인류의 진화 연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포타슘/아르곤(K/Ar) 기법으로 ‘화석을 덮고 있는 화산암의 연대가 약 180만 년 전’이라는 걸 196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알아냈다. 당시에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오래된 연대였다. 아울러 본격적으로 인류가 세상에 출현한 연대도 실감하게 했다. 이 발견으로 루이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미국 지리학회가 장기 조사를 위해 재정을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이 유적에 있는 리키 캠프는 아프리카 인류 진화연구의 거점이 된 것이다.
올도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석기문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인 올도완(Oldowan) 석기 문화가 두 가지 다른 종의 인류 화석과 함께 발견됐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진잔트로푸스 화석이 발견된 동일한 지층에서 이보다 두뇌 용적이 크고 얼굴이 갸름한 인류 화석이 발견됐다. 이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도구를 만드는 사람)라고 명명됐는데, 이들이 180만 년 전에 석기를 최초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뜻을 담았다. 최근에는 그보다 훨씬 앞선 330만 년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석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석기 문화=호모(Homo) 행위'라는 등식은 깨졌다. 또 진잔트로푸스가 딱딱한 식물 음식만 먹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오류로 판명됐다. 아울러 올도완이 시간이 흐르면서 아슐리안(주먹도끼)이 포함된 석기 문화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 올두바이 유적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올두바이 유적은 인류 초기 석기문화의 발전 단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진화 논쟁
리처드 리키는 그의 형이 발견한 OH7(올두바이 인류 화석 7·호모 하빌리스 화석)과, 어머니인 메리 리키가 발견한 OH5(진잔트로푸스 화석,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는 각기 다른 인류 진화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74년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됐을 때 올두바이 협곡의 두 고인류 화석과 루시 화석, 이들의 진화상 위치에 대한 논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당시 미국의 저명한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가 시사 방송프로그램에서 다룰 정도였다.
리처드는 “루시가 두 화석 인류,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호모의 공동 조상이 될 수 없다. 호모의 진화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독립적으로 일어났다”고 봤다. 반면 루시를 발견한 도널드 조핸슨(미국·1943~)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서 두 가지 다른 고인류가 갈라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제는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은 아니지만, 아파렌시스에서 후대 인류가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확실하게 직립했지만, 침팬지 수준의 두뇌 용적을 가진 아파렌시스인 루시의 진화상 위치는 당시 과학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 소년의 탐구, 다윈의 '인간 기원론'을 입증하다
다윈이 인류 진화를 논하기 시작한 19세기부터 최초의 인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다. 19세기 말 외젠 뒤부아(네덜란드·1858~1940)가 호모에렉투스를 발견하자 “동아시아가 기원지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20세기 초 다트(남아프리카·1893~1988)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발견했을 때는 남아프리카가 그 기원지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올두바이 고르지 유적은 동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지일 것이라는 다윈 학설에 신빙성이 있음을 보여줬다. 실제로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리프트 밸리 곳곳에서는 이보다 더 오래된 인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1925년 시작돼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리키 가족의 올두바이 유적의 탐구와 그 결과물은 세계적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오늘날 인류 진화사의 골격을 만들었다. 한 소년의 꿈과 집념이 이루어낸 신학문 성공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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