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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퇴사' 거스르는 14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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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재작년 미국에선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가 유행했다.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건 아니지만 딱 내 할 일만 하겠다는 다짐이다. 일 때문에 삶을 희생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일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핵심. 아이디어를 냈다가 일 폭탄을 맞거나 조직을 위한 쓴소리를 했다가 모난 돌이 되는 우리나라에서도 조용히 퇴사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데 최근 새로 담당하게 된 기관에서 이 흐름에서 조금 비껴나 있는 사람들을 봤다. 방송의 공정성 등을 심의해 방송사를 징계하는 권한을 가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다. 이곳에선 두 달 전 류희림 방심위원장의 ‘청부 민원’ 의혹이 불거졌다. ①류 위원장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방송사들을 심의해달라고 방심위에 민원을 넣게 한 후 ②본인이 심의에 참여해 방송사 4곳에 역대 최고 과징금인 1억4,000만 원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①은 아직 의혹이고 ②는 사실이다. 방송사들이 징계를 받은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 수사를 무마했다는 의혹을 인용 보도했기 때문이다.
익명의 공익제보자는 류 위원장을 이해충돌방지법 위반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했다. 하지만 류 위원장은 이 의혹을 ‘민원인 개인정보 불법 유출 사건’으로 프레임을 바꿔 내부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정권에 불리한 보도를 한 방송사, 법 위반 의혹을 신고한 제보자를 어떻게든 손보겠다는 시도였다.
제보자 색출이 시작되자 사무처 직원 149명은 실명으로 류 위원장을 권익위에 신고했다. 직원 대다수가 공익신고자가 되어 권익위에 조사를 촉구한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에 따르면 류 위원장은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했다”며 “이는 방송 내용의 공공성 및 공정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독립적인 사무를 수행해야 하는 방심위의 존립 취지를 훼손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전체 구성원의 80%가 밥벌이를 걸고 제 목소리를 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들의 직장은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론 탄압의 선봉에 세울 수 있는 곳이다. 형식상 민간독립기구지만 정부가 예산권과 임명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여권 추천 방심위원들만 위촉해 야권 추천 위원은 한 명도 활동하지 못하는 현재의 기형적인 구조도 그래서 가능했다. 더구나 지금은 대통령 앞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하면 입이 틀어막힌 채 사지가 붙들려 쫓겨나는 시절 아닌가.
입은 닫고 내 할 일만 하는 게 얼마나 속 편한 일인지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안온함을 포기한 이유가 언론 자유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이나 정교한 정치적 계산은 아닐 것이다.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직장인이 직업 윤리를 침해당했을 때, 직업인으로서 존엄을 지키겠다는 결심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런 결심은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이기도 하다.
방심위 직원들이 위원장의 법 위반을 목격하고도 ‘조용히’ 자기 일만 했다면 이 시절은 얼마나 더 어둡고 초라했을까.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존엄과 공동체를 위해 자기 몫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언론인으로서, 국민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이런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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