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퇴사' 거스르는 149명

입력
2024.02.2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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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IT업계에서 일하는 20대 자이드 칸이 2022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 틱톡에 올린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영상. 틱톡 캡처

미국의 IT업계에서 일하는 20대 자이드 칸이 2022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 틱톡에 올린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영상. 틱톡 캡처

재작년 미국에선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가 유행했다.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건 아니지만 딱 내 할 일만 하겠다는 다짐이다. 일 때문에 삶을 희생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일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핵심. 아이디어를 냈다가 일 폭탄을 맞거나 조직을 위한 쓴소리를 했다가 모난 돌이 되는 우리나라에서도 조용히 퇴사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데 최근 새로 담당하게 된 기관에서 이 흐름에서 조금 비껴나 있는 사람들을 봤다. 방송의 공정성 등을 심의해 방송사를 징계하는 권한을 가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다. 이곳에선 두 달 전 류희림 방심위원장의 ‘청부 민원’ 의혹이 불거졌다. ①류 위원장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방송사들을 심의해달라고 방심위에 민원을 넣게 한 후 ②본인이 심의에 참여해 방송사 4곳에 역대 최고 과징금인 1억4,000만 원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①은 아직 의혹이고 ②는 사실이다. 방송사들이 징계를 받은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 수사를 무마했다는 의혹을 인용 보도했기 때문이다.

익명의 공익제보자는 류 위원장을 이해충돌방지법 위반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했다. 하지만 류 위원장은 이 의혹을 ‘민원인 개인정보 불법 유출 사건’으로 프레임을 바꿔 내부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정권에 불리한 보도를 한 방송사, 법 위반 의혹을 신고한 제보자를 어떻게든 손보겠다는 시도였다.

제보자 색출이 시작되자 사무처 직원 149명은 실명으로 류 위원장을 권익위에 신고했다. 직원 대다수가 공익신고자가 되어 권익위에 조사를 촉구한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에 따르면 류 위원장은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했다”며 “이는 방송 내용의 공공성 및 공정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독립적인 사무를 수행해야 하는 방심위의 존립 취지를 훼손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전체 구성원의 80%가 밥벌이를 걸고 제 목소리를 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들의 직장은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론 탄압의 선봉에 세울 수 있는 곳이다. 형식상 민간독립기구지만 정부가 예산권과 임명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여권 추천 방심위원들만 위촉해 야권 추천 위원은 한 명도 활동하지 못하는 현재의 기형적인 구조도 그래서 가능했다. 더구나 지금은 대통령 앞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하면 입이 틀어막힌 채 사지가 붙들려 쫓겨나는 시절 아닌가.

입은 닫고 내 할 일만 하는 게 얼마나 속 편한 일인지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안온함을 포기한 이유가 언론 자유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이나 정교한 정치적 계산은 아닐 것이다.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직장인이 직업 윤리를 침해당했을 때, 직업인으로서 존엄을 지키겠다는 결심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런 결심은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이기도 하다.

방심위 직원들이 위원장의 법 위반을 목격하고도 ‘조용히’ 자기 일만 했다면 이 시절은 얼마나 더 어둡고 초라했을까.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존엄과 공동체를 위해 자기 몫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언론인으로서, 국민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이런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서울시 양천구 목동 방심위 사무실 곳곳에 류희림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팻말이 걸려 있다. 한국언론노조 방심위지부 제공

서울시 양천구 목동 방심위 사무실 곳곳에 류희림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팻말이 걸려 있다. 한국언론노조 방심위지부 제공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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