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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을 대체한 유교의 글씨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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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서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예전에 ‘쫌 있는 집’에 가면 한자로 휘갈겨 쓴 액자가 걸려 있곤 했다. 그런데 웃기는 건, 그 집 식구들도 ‘누가 썼다’만 알지 글자 내용은 잘 모른다는 점. 즉 우리 문화에는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글씨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글은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므로 당연히 내용이 중요하다. 그런데 유독 한자는 뜻을 넘어서 그림과 상징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해서 난해하게 휘갈겨 쓴 글이 더 ‘있어 보이곤’ 한다. 즉 ‘읽기 어려울수록 더 좋은(?) 글’이라는 이상한 문화가 생긴 것이다.
불교는 추모례(재ㆍ齋)를 올릴 때 그림을 사용한다. 이런 그림을 진영(眞影)이라고 하는데, ‘본질을 내포한 허상’이라는 뜻이다. 유교의 제사에서는 진영 대신 글씨 중심의 위패를 사용한다. 즉 ‘그림이라는 형상주의’와 ‘글씨라는 무형상주의’의 충돌이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엔 진영 외에도 집 안에 불상과 불화를 모시는 문화도 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면 입구에 관우 등이 모셔져 있는 것이 목도된다. 가게를 보호하고 나쁜 일을 막아주는 수호신의 의미다. 이는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종교에서 집안의 수호를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까지 집에서 불상과 불화를 모시던 형상주의는 조선의 등장과 함께 ‘에너지가 응축된 글자 상징’으로 대체된다. 즉 또 다른 형상주의와 무형상주의의 충돌인 셈이다.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당나라 미술사학자 장언원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書畫同源’(서화동원ㆍ글씨와 그림은 같은 기원을 가짐)이라고 했다. 글자와 그림의 이중성은 글자를 통한 형상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수체(眉叟體)의 창시자인 조선 중기 학자 허목(許穆·호는 眉叟)은 1661년 삼척 부사를 지낼 때, 동해의 파도 문제가 심각해지자 구불구불한 전서체로 <척주동해비>를 짓고 건립했다. 신기하게도 비석이 세워지자, 파도 문제가 해결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비석은 파도를 물리치는 비석이라는 의미의 <퇴조비>(退潮碑)로도 불리게 된다. 불교였으면 불상을 조성했을 사건에 글씨가 등장한 것이다.
불교의 형상주의를 유교의 무형상주의가 대체하면서 불교시대에 존재했던 집 안에 불상을 모시던 풍습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런 글씨 문화가 최근까지 이어져 집주인도 잘 알지 못하는 글씨가 표구돼 거실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집에는 불상을 모시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교 인식이 확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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