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고려거란전쟁 양규가 탄생한 서재에서 그는 고려 역사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양규요? 역사서에 남은 기록 다 모아 봐야 20~30줄 되려나요. 용감하게 싸운 것 같은데 기록도 적고 하니까 처음엔 '와~ 멋진 사람이네' 하고 지나갔죠. 그런데 소설을 계속 이어 쓰면 쓸수록 양규로 되돌아가서 다시 쓰고, 다시 쓰고, 또다시 쓰게 되더라고요. 양규의 활약과 그에 따른 파급력이라는 게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니까요. 그렇게 양규의 분량이 자꾸 늘다 보니 그럼 아예 고려거란 2차전쟁과 양규 얘기를 뼈대로 쓰자, 그렇게 된 겁니다."
최근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KBS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자로 꼽히는 길승수(51) 작가의 고백이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시청자들을 열광시킨 인물은 양규였다. "드라마를 통해 양규를 처음 알았다", "고려시대의 이순신이다" 같은 찬사가 이어졌다.
양규를 전면에 내세운 1,000여 쪽에 이르는 소설이 바로 길 작가가 쓴 '고려거란전쟁 상·하권'이다. 원래 고려거란전쟁 전체를 다루려다 양규 분량이 자꾸 늘어나면서 일단 양규 중심으로 책을 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상징되는 고려거란 3차 전쟁 이야기는 지금 마무리 작업 중이다.
양규 분량이 늘어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 분위기다. 2차 전쟁 때 거란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 중국 송나라와 싸울 때도 동원한 최대 병력이 20만 명 수준이었다. 두 배에 가까운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기록에 보면 성종이 비록 황제지만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어머니 소태후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고 해요. '격구는 위험하니 하지 말라'는 소태후의 잔소리에도 끽 소리 한번 못 냈던 황제가 성종이에요." 그런 소태후가 죽은 뒤 황제로서 전권을 행사한, 황제로서 체면을 건 첫 야심작이 고려 침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3,000명 병력으로 흥화진에서 버텨냅니다. 멋지지 않나요."
이어진 곽주성 탈환 작전도 예술적이다. "양규는 1,700명 병력으로 거란군 6,000명이 지키고 있던 성을 빼앗습니다. 화포가 없던 시절 공성전에서 이기려면 5배에서 10배 정도의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3만~6만 명의 병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겨우 1,700명으로 이걸 해내요. 엄청난 일이지요."
퇴각하는 거란군을 끊임없이 괴롭힌 부분도 포인트다. "후퇴하는 거란을 계속 괴롭혔다 수준이 아니라, 실제 거란에 엄청난 타격을 줍니다. 그렇게 패한 성종이 가만 있었겠어요? 당장 보복을 하라고 닦달을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길 작가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인명손실이었다. "당시 겨울비가 엄청 내렸다고 해요. 게릴라전도 게릴라전이지만 추운 겨울비에 젖은 것도 타격이 컸을 거예요. 송나라 기록을 보면 2차 전쟁 결과를 두고 '거란의 귀족 관리 병사 태반이 돌아가지 못했다' '글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 있어도 관리로 썼다'는 대목이 있어요. 한마디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중간 간부진들이 너무 많이 죽은 겁니다."
다른 하나는 말이다. 사람뿐 아니라 말도 너무 많이 죽었다. "몽골 등에서 말을 조달해 와야 하는데, 말이 전 재산인 유목민에게 말을 자꾸 뺏어가니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 반란 진압에만 몇 년이 걸려요. 말도 그냥 말이 아닌 게,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 칼, 활을 쓰는 전쟁에 쓰려면 2~3년 정도 따로 훈련해야 해요. 그걸 전마(戰馬)라 불러요. 말을 구해도 훈련 시간이 필요한 거죠."
처음엔 퇴각하는 적의 군대를 적당히 돌려보내지 굳이 왜 저렇게까지 하나 했는데, 이런저런 자료를 계속 구해다 보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양규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행동의 여파가 무엇이었는지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엄격한 사료적 증빙이 있어야 말할 수 있는 학자와 달리, 사료가 간략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커졌기에 소설가로선 유리했다. 소설을 쓰다가 자꾸만 양규로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간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길 작가가 꼽은 고려거란전쟁의 핵심인물은 의외로 고려의 6대 왕 성종이었다. 이는 고려거란 1차 전쟁의 영웅 서희에 대한 재평가와 연결돼 있다. "서희를 두고 흔히 '화려한 외교로 강동 6주를 얻었다' 그러지만 그건 일면적 평가예요." 당시 거란과 고려가 맺은 조약의 핵심은 고려가 강동 6주를, 거란은 요동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일방적 이익이 아니라 윈-윈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성종과 서희는 이후 국가 시스템을 정비한다. "거란과 충돌이 불가피하다 본 거죠. 그래서 북부 국경지대를 서북면과 동북면으로 나누고 이를 '두 개의 방패'로 만듭니다. 새로 얻은 땅 강동 6주는 아예 군사 요새화해요. 흥화진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후방에 고려의 주력군을 소집, 운용하는 체계를 만듭니다. 방패에 이어 '창'을 준비해 둔 거지요.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거란과 맞붙을 수 있었던 힘입니다."
얼마나 단단하게 준비해 뒀던지 2차 전쟁을 앞둔 거란 측 기록을 보면 '고려 성이 단단하고 방비가 철저하니 공격은 무리'라는 반대론 또한 적지 않았다. 이런 기반을 갖춘 사람이 성종과 서희였고,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양규와 강감찬이 버텨내고 이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성종과 서희의 진짜 공로는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게 길 작가의 주장이다.
그래서 길 작가는 시스템을 강조한다.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 국역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물론,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안주섭 교수의 '고려 거란 전쟁', 역사학자 임용한의 '전쟁과 역사' 같은 책들 반복해 읽었다. 세세한 역사적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한국중세도량형제연구' '고려시대 친위군 연구' 같은 전문서적도 가리지 않았다. 원래 역사소설 마니아였다는 점도 도움이 됐다. 그중 길 작가가 꼽은 제일은 중국의 열국지,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로 시야를 돌리면 눈물의 기록밖에 안 보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식민시기 이야기가 너무 익숙한 탓일까요. '무능한 지도층, 고초를 겪는 순박한 민초들, 능력 있지만 박해받고 제거되는 비극적인 영웅'이란 도식이 확고해요. 우리 역사에서 뭔가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고 잘 돌아갔던 시기는 단 한번도 없었을까요."
고려거란전쟁은 바로 그 시스템이 빚어낸 영광의 순간이다. 전쟁에서 이기자 거란, 그리고 뒤이은 여진족도 고려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송나라의 대접도 달라졌다. 고려 사신이 가면 곳곳에서 환대를 하고 깍듯이 모셨다. "K팝, K드라마가 전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21세기 지금 이 시대의 정서와도 더 잘 어울리지 않나요."
2009년 역사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고려거란전쟁을 굳이 고른 이유도 거기 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1년 만에 초고를 완성했는데 스스로 읽어봐도 "역사소설이 아니라 무협지 수준"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 싶어 역사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죠. 그때 마침 각종 사료들이 디지털화돼 공개되던 시기였어요. 자료를 계속 들여다보면서 제 나름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다시 쓰고 다시 쓰고 하면서 지금처럼 소설이 완성된 건 2015년.
하지만 아무 이름 없는 신출내기 역사소설가에게, 그것도 별 시장성 없어 보이는 고려시대를 다룬 책에, 유명한 서희도 강감찬도 아닌 양규를 전면에 내건 소설에 손 내미는 곳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책을 냈지만 반응도 없었다.
"개인적으론 몇 년간 전력을 다해 쓴 소설인데 정신적으로 공황이 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귀주대첩 1,000주년인 2019년 jtbc가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를 제작하면서 그에게 접촉해 온 것이다. 다큐 자문에 참여했고 이후 소설의 재출간, KBS드라마화가 이어졌다. 새로 낸 소설은 지금까지 6쇄 정도 찍었다.
길 작가가 원래 역사소설가를 꿈꾼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별다른 꿈도 없었고, 대학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한때 고시를 볼 거라 큰소리도 쳤지만 딱히 목표로 했던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라도 하나를 진득하니 했었어야 하는데, 그땐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절박하지도 않았던 거 같아요. 철이 없었다 해야 하나."
그래도 역사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된 건 하나 있다. 짧은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했다. "미식축구 전략 전술이 로마군단에서 나왔다고 해요. 방어와 공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동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거죠. 전쟁 장면을 구상할 때는 지금도 도움이 되죠."
강감찬 이야기를 마저 써내고 나면 이번엔 임진왜란에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다. "고려거란전쟁이 블루오션이었다면 거긴 레드오션 아니냐, 주변에선 많이 걱정해 주시더라고요. 하지만 전쟁과 전략전술의 리얼함을 묘사하는 건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렵겠지만 한번 도전해 봐야죠."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