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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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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 어렸을 때 밤 9시 뉴스 시작 전 TV에선 ‘잘 자라 우리 아가’ 자장가와 함께 이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군사정권 시절 청소년은 ‘땡전뉴스’(9시 땡 시작과 함께 당시 전두환 대통령 소식부터 전하던 방송)도 볼 생각 말라는 뜻이었는지, 성장기 충분한 수면을 위한 국가적인 배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그러나 중고생이 되며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3당4락’(하루 3시간만 자고 공부하면 대학에 붙고 4시간 이상 자면 떨어진다는 뜻)의 치열한 입시 지옥에서 일찍 잔다는 건 죄가 됐다. 회사도 야근이 잦아 퇴근이란 게 따로 없던 때였다. 밤 12시 전 귀가는 드물었다. 이렇게 잠도 안 자며 공부하고 일한 뒤 ‘내수진작’에도 기여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됐다.
□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인은 잠들지 못한다. 대통령마다 사교육을 없애겠다고 외쳤지만 지금도 매일 밤 10시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선 학생들이 쏟아지며 교통정체가 빚어진다. 아이들은 학원 숙제 하느라 부족한 잠을 학교에서 잔다. 어른들도 끊임없이 뜨는 '카톡'과 스마트폰 '알림'에 잠을 도둑맞은 건 마찬가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하길 강요하고, 유튜브도 알고리즘 취향저격으로 잠을 뺏아간다. 빛공해도 심각하다. 인구 절반이 모인 수도권은 한밤에도 잠들기엔 너무 밝다. 골목마다 24시간 편의점도 잠을 방해한다. 자본의 성장을 위해 자극이 끊이지 않는 이런 환경에서 일찍 잔다는 건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는 것보다 더 어렵다.
□ 미국 MZ(밀레니얼+Z)세대 가운데 밤 9시에 취침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수면과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은 젊은 층이 점점 더 일찍 그리고 더 오래 자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은 해가 지면 잠을 자도록 진화돼 왔다. 오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게 건강에 좋을 리 없다. 수면에 대한 관심과 시장이 커지며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이젠 입시전쟁과 성장지상주의, SNS 등에 도둑맞은 잠을 되찾아야 할 때다. 잠을 자야 꿈도 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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