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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피해자 돕기는 '손해배상' 아닌 '사회보장' 개념에서 접근해야

입력
2024.02.09 16:0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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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피해자: ⑮원혜욱 전 피해자학회장 인터뷰]

편집자주

한국일보의 심층기획 '나는 범죄 피해자입니다'는 지금까지 14건의 기사를 통해 ①피해자 구조 제도의 문제점 ②보복 범죄의 현실 ③수사기관의 무신경 ④재판에서 소외되는 피해자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 마지막 기사에선 한국의 범죄피해자 구조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합니다. 한국피해자학회장을 지낸 원혜욱 교수와 함께 새로운 시스템의 모습을 고민해 봤습니다.

원혜욱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피해자학회 회장)가 18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학교 연구실에서 한국일보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4.01.18 인천=김예원 인턴기자

원혜욱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피해자학회 회장)가 18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학교 연구실에서 한국일보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4.01.18 인천=김예원 인턴기자

헌법 제30조는 범죄피해자에 대한 구조(도움)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범죄피해자들의 현실은 매우 열악했다. 피해자는 수사·재판 과정에선 뒷전으로 밀렸고, 국가의 구조망은 얇고 느슨했다. 지난달 18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 로스쿨관에서 본보와 만난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한국피해자학회장)는 그 원인으로 부족한 예산과 전문 인력을 지목했다. 그는 "국가의 구조와 지원을 받는 것은 범죄 피해자들의 당연한 권리"라며 "보다 체계적이고 확실한 사회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원 교수와의 일문일답

-범죄피해자의 구조청구권이 헌법에 명시된 국가는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 헌법에 들어가게 과정이 궁금합니다.

"과거 우리 사회는 범죄에 대해 응보(악행에 대한 갚음)적인 사고가 훨씬 강했어요. 선진국들이 이미 1960년대부터 범죄피해자 보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반면, 한국은 범죄가 발생하면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만 집중했지요. 하지만 여러 대형 사건을 거치면서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인식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범죄 피해자를 사회가 지원하고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이 퍼진 것이죠. 그러다 1987년 개헌 논의와 맞물리면서 구조청구권이 헌법에 명시된 것이죠. "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라기엔 지원 수준이 다른 선진국들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영국이나 뉴질랜드 같은 선진국들은 사회보장이나 사회적 보험의 개념으로 범죄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요. 범죄 피해는 사회가 모두 같이 책임을 지겠다는 개념이죠. 사회가 피해자의 삶을 지키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과 전통이 강하고, 그들을 위한 기부 문화도 활성화 돼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뉴질랜드 사고보상공사(ACC) 같은 경우는 자동차 등록세, 유류세 등 같은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하기도 하죠.

하지만 한국의 범피해자보호법을 보면, 피해자 지원을 사회보장이 아니라 '손해배상'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손해배상은 손해를 일으킨 사람(가해자)이 손해를 입은 사람(피해자)에게 배상을 하는 개념이에요. 가해자가 해야 할 손해배상을 일단 국가가 대신 하고,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대위 청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지요."


-손해배상 개념의 피해자 지원이 갖는 한계점이 있을까요?

"우선 피해자를 지원하기 전에 피해의 원인이 (확정적인) 범죄일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죠. ①범죄 ②피해에 대한 ③손해배상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구성요건과 위법성, 책임을 따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피해자 입장에서는 "지원이 너무 느리고 소극적이다"는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범죄 신고 여부, 심지어 범죄인지 사고인지 여부도 따지지 않고 지원하는 선진국의 제도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 셈이지요.

또한 손해배상 차원의 지원은 피해자의 소득을 기준으로 이뤄져요. 피해자가 정상 생활을 했을 때 어느 정도의 소득을 가질 수 있는지를 따지기 때문에, 원래부터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피해자에겐 더 부족한 구조금이 지급될 수밖에 없는 구조지요. 하지만 강력범죄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던 분들에게 발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무엇보다 손해배상 차원의 지원과 구상권 행사는 '범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없다'는 사고 아래서 가능한 거죠. '국가의 범죄 피해자 구조 의무'를 명시한 헌법의 취지를 제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없죠. 한국의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도 사회 보장적 성격으로 변화해 나가야 합니다."


-취재를 해보니 구조금이나 경제적 지원이 누락된 사례도 꽤 많더라고요.

"구조금 심의와 같은 주요 권한은 검찰과 법무부에 있지만, 이것을 안내하고 챙겨주는 실무는 일선 범죄피해자센터에서 많이 이뤄져요. 하지만 센터마다 전문성이나 적극성 면에서 편차가 크죠. 2004년을 전후해 전국 검찰청마다 센터가 들어섰는데 이후에도 인적 구성 측면에서 크게 변하지 못했어요. 피해자 지원 제도 도입 초기부터 헌신해 오신 분들이지만, 법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에요. 직원이 한두 명인 곳이 많고, 그마저 최저시급 정도를 받으며 자원봉사처럼 운영되지요.

이제 체계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소위 '열정 페이'에 기대기에는 '범죄 피해'라는 사안은 이제 너무 중대해졌죠. 전문 인력을 채용할 수 있도록 예산을 투입하고,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이 꾸준히 이뤄져야 해요. 전문가들이 피해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심리상담과 더불어 구조 방안이나 지원 제도를 세세하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보장으로서의 피해자 지원이나, 실무를 체계화하려면 예산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사실 현재 범죄피해자보호기금 운용 방식은 조금 기형적입니다. 피해자 지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금임에도, 실제 도입·운영하는 과정에서 기존 일반예산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업이 많이 들어와 버렸어요. 여성가족부(성폭력·가정폭력), 보건복지부(아동학대) 등 보호·상담센터의 운영비와 인건비까지 기금에서 나가다 보니, 정작 피해자들을 위한 직접 지원 예산(구조금 등)은 매우 부족합니다. 법무부 사업 가운데도 국선 변호인, 형사 조정과 같은 사업은 일반예산으로 돌려야 해요.

시설 운영비를 비롯한 간접 사업비는 각 부처 일반예산으로 돌리고 기금은 피해자 직접 지원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기금에 납입되는 벌금액이 유동적인 문제는 사회복지기금을 일정부분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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