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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태광 내분… 1인자의 '토사구팽'인가, 2인자의 '호가호위'인가

입력
2024.02.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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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 1·2인자 진흙탕 싸움의 전말]
이호진 전 회장, '특사' 직후 김기유 해임
고강도 특별감사... 검찰에 김기유 고발
김기유, 경찰·검찰에 "회장 비위" 제보
'김치·와인' 법원 최종 판단 총알도 남아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2018년 12월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횡령·배임 혐의 관련 파기환송심 1차 공판을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2018년 12월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횡령·배임 혐의 관련 파기환송심 1차 공판을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찰은 이호진 전 회장의 횡령·배임 의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 전 회장 공백 기간 그룹 경영을 맡았던 전 경영진이 저지른 비위 행위였다는 것이 감사 결과로 확인되고 있다."

경찰의 압수수색에 대한 태광그룹 입장문

지난해 10월 24일, 태광그룹 본사 사무실에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소속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 들린 압수수색 영장에 적힌 건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수십억 원대 불법 비자금 조성, 계열사 공사비 부당지원 등 혐의. 이 전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복권(형의 선고로 상실되거나 정지된 자격을 회복시켜주는 조치)된지 두 달 만에 또 다시 수사대상에 올랐단 소식에 여론도 술렁였다. 하지만 뒷날 그룹은 공식 입장문을 내고 이 혐의 주체를 '전 경영진'이라고 못박았다. 전 경영진은 바로, 불과 두 달 전 회사를 떠난 김기유 전 태광그룹 경영기획실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기유 전 실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룹 실세' 내지는 '2인자'. 2007년 태광으로 적을 옮긴 그는, 이 전 회장이 2011년 회사자금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뒤 실형을 선고받자 옥바라지를 자처하며 회장의 신임을 얻었다. '대리인'으로서 회사 경영도 도맡았다. 2014년 경영기획실장 자리에 올랐고, 2022년엔 그룹 경영협의회 의장을 맡아 이 전 회장의 공백을 채웠다. 경영협의회는 그룹의 주요 경영 안건 등을 논의하는 경영협의기구로, 24개 계열사가 모두 속해 있다. 같은 기간 이 전 회장은 간암 치료를 이유로 약 8년 간 병보석 상태로 있다가, '황제보석' 논란이 불거지자 2018년 말 보석이 취소돼 재수감됐다. 그 뒤 201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돼 2년 여를 더 복역했다.

이렇게 십년 넘도록 이어졌던 태광의 '1인자' 이 전 회장과 '2인자' 김 전 실장의 밀접한 관계가, 지난해 하반기 돌연 끊어졌다. 이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돌아온 1인자, 축출된 2인자... 배경은

서울 중구 태광그룹 흥국생명 빌딩.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중구 태광그룹 흥국생명 빌딩. 한국일보 자료사진

갈등의 불씨는 경찰 압수수색 두 달 전 부터다. 지난해 8월 초, 태광그룹은 부동산 관리와 건설·레저(골프장) 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 '티시스'에 대한 내부 감사를 통해 비위 정황을 잡아냈다. 티시스 대표가 바로 김 전 실장이다. 같은 달 24일, 김 전 실장은 해임됐다.

'2인자 숙청'은 시작에 불과했다. 태광은 곧장 24개 계열사 전체로 특별감사 범위를 넓혔다. 기업 수사 전문가들이 포진한 법무법인과 자문 계약도 맺었다. 이 법무법인은 검사·수사관·회계사 출신 변호사 10명을 투입한 팀을 꾸렸고 그해 9월부터 2개월 동안은 태광 사무실로 출퇴근하며 고강도 감사를 벌였다. 비위 정황이 발견되면 소관부서 업무용 컴퓨터를 모조리 가져가 디지털 포렌식 작업도 했다.

허울 뿐인 감사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룹은 김 전 실장의 개인 비리 정황을 다수 포착했으며, 일부는 먼저 검찰에 고발했다. 고발장엔 100억 원대 배임 혐의가 담겼다. 서울서부지검 형사4부(부장 유효제)는 지난달 24일 김 전 실장의 주거지와 태광그룹 계열의 저축은행 두 곳의 대표 주거지, 사무실 등 6곳을 압수수색했다. 김 전 실장에겐 친분이 있던 부동산개발업자에게서 사채 변제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태광 계열사인 저축은행 대표에게 대출을 지시해 약 150억 원 상당의 부당대출을 실행하게 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가 적용됐다.

이 모든 게 이 전 회장의 복권 반년이 되기도 전에 모두 일어난 일이다. 회사 안팎에선 이 전 회장의 김 전 실장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간 배경으로 '롯데홈쇼핑 사옥 매입 사건'을 지목한다.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7월 이사회에서 세 들어 살던 서울 양평동 롯데홈쇼핑 사옥을 2,039억 원에 매입하기로 한 안건을 의결했다. 롯데홈쇼핑의 2대 주주(지분 45%)인 태광산업(태광그룹의 모기업)은 이사회 때 사옥 매입에 찬성했으나, 이 전 회장의 복권 직후 돌연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법원에 이사회 결정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고, 공정거래위원회 신고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태광과 롯데 사이엔 해묵은 갈등이 있다. 이 전 회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식품 회장의 사위로, 두 기업은 사돈 관계다. 롯데와 태광산업은 2006년 롯데홈쇼핑(옛 우리홈쇼핑)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충돌하다가 우리홈쇼핑이 결국 롯데 품에 안겼다. 태광은 인수 승인을 취소해달란 소송까지 냈으나 패소했고, 2대 주주로 남아 롯데홈쇼핑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법인명을 바꾸기 위한 정관 변경도 태광이 가로막아서, 여전히 롯데홈쇼핑의 법인명은 '우리홈쇼핑'으로 돼 있다.

'제 살 궁리' 수사기관 들쑤신 2인자

김기유 당시 태광그룹 경영기획실장이 2016년 10월 11일 국회 정무위의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기유 당시 태광그룹 경영기획실장이 2016년 10월 11일 국회 정무위의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이유로 그룹 밖으로 돌연 내쫓긴 김 전 실장도 살 구석을 찾아야 했다. 그가 두드린 곳은 수사기관.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에 '이 전 회장의 개인 비위 정황이 담겼다'며 각종 내부 자료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첩보를 받은 경찰은 지난해 10월부터 이 전 회장의 자택과 개인 계좌 및 휴대전화, 태광그룹 경영협의회 사무실과 계열사 등을 수차례 압수수색한 뒤 자금흐름을 짚어왔다. 지난달 20일엔 이 전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경찰이 적용한 경영비리 혐의는 2013~2018년 이 전 회장이 수감과 병치레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에 집중됐다고 한다. 내부 감사에 불만을 품은 쪽의 제보로 시작된 수사라는 얘기까지 회사 안팎에서 나왔다. 다만 이와 무관하게 경찰의 칼끝은 이 전 회장을 향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실장은 검찰 문도 두드렸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 용성진)는 지난해 말 태광그룹의 '계열사 김치·와인 강매 의혹' 사건 관련, 김 전 실장의 요청에 따라 그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2021년 8월 검찰은 김 전 실장을 주범으로 결론 내린 뒤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기면서도, 이 전 회장에 대해선 "재무상황 등을 보고받거나 지시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김 전 실장은 지난해 10월 1심에서 벌금 4,000원을 선고받아 항소심 중이다.

그렇게 김 전 실장의 비위 사건으로 끝날 뻔한 사건은, 대법원 행정소송 판결로 다시 되살아났다. 대법원은 지난해 3월 이 전 회장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취소 소송에서 "김 전 실장이나 경영기획실이 이 전 회장 몰래 김치·와인을 거래할 동기를 생각하기 어렵다"며 "(김 전 실장이) 오히려 경과를 보고해 자신의 성과로 인정받으려 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공정거래법상 '관여'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해 이 전 회장에 불리한 판단을 내놓은 셈이다. 다음달 6일 열리는 파기환송심에서도 이 전 회장의 책임을 인정하면, 그의 사법리스크도 다시 비화할 가능성이 적잖다.

피튀기는 집안 싸움의 말로는?

한편 이 전 회장은 올해 상반기를 목표로 경영에 복귀할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태광그룹 모기업 태광산업의 새 대표이사로 성회용 티캐스트 대표가 선임됐다. 이 전 회장의 측근으로 꼽히는 성 대표의 신임은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를 돕기 위한 사전 단계라는 해석이 나왔다. 다만 전문경영인 체제를 통해 사법리스크를 최소화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힘들 땐 수족처럼 부리다가 쳐낸다"는 2인자의 호소가 진실일지, "궐위 기간 기업을 먹으려 했다"는 1인자의 반격이 성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강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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