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콩을 다루는 마음

입력
2024.02.03 04:30
19면

커피

편집자주

열심히 일한 나에게 한 자락의 휴식을… 당신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방법, 음식ㆍ커피ㆍ음악,ㆍ스포츠 전문가가 발 빠르게 배달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몇 년 전 나는 커피를 볶는 로스터가 되었다. 30년 가까이 커피 마니아로 살며 커피에 관한 책을 읽고 커피 교실에 나가 공부했지만, 로스팅은 여전히 내 영역이 아니라고 여겼다. 더구나 내가 존경하는 커피 스승들이 어떤 자세로 로스팅에 임하는지를 떠올리면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우연과 필연이 겹쳐 나는 로스터가 되었고,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아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조금 익숙해졌다고 느끼던 어느 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로스팅을 하다가 변화를 확인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영하의 날씨에는 실내 온도나 생두도 영향을 받았을 텐데, 그 미묘한 차이를 간과하는 바람에 다른 결과물이 나와버린 것이다. 나만 아는 차이라 치부하며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넘어가는 행위는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스승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커피집'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고(故) 모리미츠 선생님. 오랜 인연은 아니었으나 작고하기까지 몇 년간 잦은 만남을 통해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남긴 스승이다. 특히 로스터는 '생두(生豆), 즉 살아있는 콩을 다루는 사람'이라던 선생님의 말씀은 로스터가 지녀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엄정하게 각인시켰다.

생두란 로스팅을 거치기 이전의 커피콩(원료)을 일컫는다. 영어로는 그린빈 혹은 그린 커피다. 갓 수확한 커피체리를 껍질 벗겨 정제하면 초록빛 콩이 된다. 콜롬비아 농원에 갔을 때, 에메랄드처럼 초록으로 빛나던 커피콩을 보며 영어 이름의 유래를 수긍했다. 한데 한자권에서는 이 콩을 녹두(緑豆)가 아니라 생두라고 부른다.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말이다(여담인데 나는 신선한 생두 몇 알을 화분에 심어 커피나무로 키우고 있다).

이 생두에 섭씨 200도 전후의 열을 가해주면(로스팅) 엄청난 화학변화가 일어난다. 순간순간 성분들의 분자구조가 복잡하게 달라지고, 콩은 갈색으로 변하며 비로소 커피다운 맛과 향을 얻게 된다. 하나의 생명을 태워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 말하자면 로스팅은 또 하나의 연금술인 셈이다. 그러니 나의 스승들이 로스터로서 겸손한 마음가짐과 예민함, 나아가 소명의식을 강조한 건 과장이 아니다. 콩의 수분, 연기, 소리, 색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며 볶아낸 로스팅 장인의 커피가 기계 숫자로만 통제한 콩과 달리 깊은 풍미를 지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간혹 경험 많은 로스터들은 콩이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그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한참 멀지만, 스승들이 내게 알려준 '생두를 다루는 자'의 자부심은 절대 잃지 말자고, 초짜 로스터인 나는 오늘도 혼자 결의한다.


윤선해 ㈜후지로얄코리아·와이로커피 대표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