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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가면 거친 돌덩이 하나가 전시돼 있다.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1978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인 아틀란티스 커뮤니티 소속 활동가들이 도로 턱을 깨부순 콘크리트 조각이다. 당시 덴버시 당국이 장애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연석 경사로(인도와 차도 사이의 경사로) 설치를 중단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다니던 이동 약자들이 차 사고를 당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시 당국에 흥분한 덴버시 활동가들은 망치를 들고 도로에서 시위를 벌였고, 물리력을 동원해 깨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연석 경사로'가 무엇인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금세 알아챌 수 있을까. 일반인들에게는 제대로 보일리가 없다. 자전거를 타고, 캐리어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어서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안젤라 글로버 블랙웰 전 록펠러재단 부대표는 '연석 경사로 효과'를 처음 주창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가장 차별받는 이들의 불평등을 완화하면 전체 사회의 이익이 된다." 블랙웰은 이런 불평등 완화 조치를 두고 "장애인들이 무리하게 요구한다" "우리 복지를 빼앗고 있다"는 식의 제로섬 게임으로 봐선 안 된다고도 말한다. 장애인만을 위하는 것 같은 여러 조치 대부분이 인류 전반의 편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손목에 관절염이 있는 아내 벳시가 감자를 쉽게 깎게 하기 위해 남편인 샘 파버는 잡기 쉬운 감자 껍질깎이(필러)를 고안한다. 이렇게 탄생한 게 주방용품 업체 옥소(OXO)다. 이후 두 손을 자유롭게 쓰기 어려운 고령자, 장애인들의 니즈에 맞춰 고안한 아이디어 주방용품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급됐다.
TV의 폐쇄자막은 청각장애인 운동가들의 투쟁 끝에 1990년 미국에서 TV디코더회로법이 통과되면서 생겨났다. 폐쇄자막은 이후 유튜브나 넷플릭스 자막 서비스로 이어졌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 또한 청각 장애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장 오늘도 지하철에서 소리를 끄고 영상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은 키보드를 치면 손이 아파 한 장 이상 타이핑이 불가능했던 '반복 스트레스 증후군'을 갖고 있던 미국 엔지니어 웨인 웨스트먼이 차린 '핑거웍스'란 기업이 개발한 기술이다. 스티브 잡스가 이 기업을 인수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탄생했다.
우리 모두가 공기처럼 쓰는 도로와 건물의 환경, 생활용품과 기술들은 사실 이렇게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의 요구, 개발, 투쟁, 입법활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때로 목숨을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도로 턱을 없애달라'고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한 장애인 김순석씨다. 장애계는 그를 열사라 부른다.
안전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는 세상이어야 한다.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사회 변화로 바꾸는 건 때로는 작은 아이디어와 실천으로 가능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가, 열사도 좋지만 나는 이들을 '다른 몸의 디자이너'라고 부르고 싶다. 이런 '다른 몸의 디자이너'가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덴버 연석' 전시 설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시위를 통해 장애인 권리 단체 ADAPT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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