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시정하라’더니… 제 잘못은 방관하는 일본

입력
2024.02.01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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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한국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후 시정 요구
군마현 추도비 철거 "최고재판소 결정" 핑계
혐한·우익단체 주장만 지키는 일본 측 모순

지난달 28일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시 공원 '군마의 숲'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 앞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철거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 철거에 반대하는 시민의 모임' 제공

지난달 28일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시 공원 '군마의 숲'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 앞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철거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 철거에 반대하는 시민의 모임' 제공

"한국 정부에 국제법 위반 상태를 조속히 시정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겠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항소심 판단을 확정한 뒤 일본 총리, 관방장관, 외무장관은 틈날 때마다 이 말을 반복했다. 한국의 사법 체계가 행정부와 독립돼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한국 정부에 '불법 상태의 시정'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빨리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며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 등 경제 보복까지 했다.

한국의 국가 체계는 그렇게 무시하던 일본 정부가 지난달 29일 군마현이 강제 집행에 나선 조선인 추도비 철거에 보이는 모습은 이율배반적이다. 여러 질문에도 "지방 정부에 물어보라",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난 사안"이라며 회피 일색이기 때문이다.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 교수는 "지자체의 철거를 정부가 막으려면 우익 단체의 역사 인식을 부정해야 하는데 일본 정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역사를 부정하고 잊게 하려는 사람들을 돕게 된 셈"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 판결을 수정하라는 일본 정부의 요구를 수용해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일본 기업을 대신해 배상금을 지불하는 '제3자 변제' 방식 해결책까지 내놓은 한국 정부가 추도비 철거 강행에 제대로 항의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우호 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지 않길 바란다"는 원론적 말 정도로는 이미 시작된 철거를 중단시킬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 추도비는 과거를 반성하고자 하는 일본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 담긴 반성, 화해, 우호의 정신을 담은 비문에는 '강제연행'이란 말조차 넣지 않았을 정도로 일본인의 불편해할 마음도 살폈다. 최고재판소의 판결도 '군마현이 추도비 설치 허가 갱신을 거부한 것은 적법하다'는 판단에 불과해 추도비를 철거하라는 직접 지시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민당 의원 출신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현 지사는 추도비를 만들고 지켜 온 일본 시민들은 무시하고 혐한·우익 단체의 요구만 받아들여 철거를 강행했다.

양심 있는 일본 언론과 학자들은 철거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사설로 이번 철거가 "폭거"라며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본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사를 연구하는 라인하르트 죌너 교수는 철거를 중지하라는 온라인 서명운동까지 시작했다. "일본 시민사회가 만든 이 추도비는 역사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독일 학자의 충고를 일본 정부와 군마현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가.


도쿄=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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