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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환영받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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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불쑥 찾아오는 트라우마 하나가 있다. 2016년 맞닥뜨린 한 사건 현장에서 비롯됐다. 목사인 아빠는 중학생 딸을 훈계한다며 장기간 폭행해 왔고, 사망 당일도 7시간 때린 후 난방이 되지 않은 방에 재웠다. 11개월간 시신이 방치됐던 그 집에 취재차 도착했을 때, 백골이 된 아이는 속옷차림으로 이불 위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누워 있었다. 기자 생활을 하며 별별 현장을 다 목도했지만, 그 모진 폭력의 결말은 내게도 많이 아팠는지 기억이 그 아이를 놓질 못한다.
부부는 아이가 죽기 며칠 전 이런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허벅지와 손이 땡땡 부었다. 허벅지가 말 근육 같다. ㅋㅋ' 그들 사이 폭력이 얼마나 일상화됐었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부부는 재판 내내 "아이의 도벽 때문"이라며 범행을 정당화했고, "기도로 깨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왜곡된 신념을 변명처럼 늘어놨다.
극단적 폭력의 행태가 난무하는 요즘 이 사건이 다시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는다. 흉기 난동범들이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지 얼마 안 돼, 최근엔 두 정치인이 길거리에서 흉기·둔기를 든 이들에게 습격당했다. 범행 현장이 거의 생중계되듯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돌아다니면서 이 기막힌 사건의 장면 장면이 대중의 머릿속에 박혔다. 자신도 모르게 접해버린 잔혹함에 상당수는 심리적 후유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우리가 목격한 폭력의 크기는 너무도 큰데, 가해자들은 자기변명 위에서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해선 안 돼서 범행을 결심했다"(이재명 대표 습격 피의자) "정치를 이상하게 해서 그렇다"(배현진 의원 습격 피의자)는 이 노골적인 혐오의 말에서는, 세상의 정의를 실현한 듯한 의연함마저 느껴진다.
더욱 서늘한 건 마치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식의 환영들이다. 온라인에선 쓰러진 정치인들 뒤로 '뒤통수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정치를 잘못하면 뒤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협박 글이 이어졌다. 다음 공격 대상으로 공공연히 다른 국회의원의 실명도 들먹거린다. 은둔하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잔치로만 치부하기엔, 지난 흉기 난동 당시 쏟아졌던 '살인 예고글'의 후폭풍은 너무 강력했다.
여의도에서도 움츠린 정치인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루 수십 통의 협박성 민원 전화에 익숙하다는 의원실들도 잇따른 사건에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경찰이 나서 국회와 신변보호TF를 구성하고 사이버 순찰도 강화한다지만, 단기 대책만으로 풀릴 사안이 아니라는 게 여의도 안팎의 판단이다.
장기적 관점의 해소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인 몇몇의 자성론만으론 켜켜이 누적돼 온 혐오 감정을 풀어낼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간 '폭력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아주 위험하고 왜곡된 신념만 심어주게 될 것이다. 폭력이 일상화됐을 때 사회가 어떤 일들을 감내해야 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범으로 응답자 90% 이상이 국회와 언론을, 80% 이상이 중앙정부와 대통령을 지목했다고 한다. 일련의 극단적 사건들을 계기로 국회와 언론, 정부,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 요인들이 증오 해소를 위한 '진짜 공론화'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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