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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이상한 전화가 왔어요"... 딸 담임의 전화, 악질 추심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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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 사람들 누구야? 엄마 빚졌어?"
외벌이 김모(49)씨는 고등학생 딸의 전화를 받고 철렁했다. 곧이어 딸의 담임교사도 전화했다. "어머님, 이상한 전화가 와서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카카오톡엔 '네가 내 개인정보를 팔았다는데, 무슨 일이냐'는 지인들의 글이 쌓였다. 대출업자가 정한 이자 상환 시간이 넘어가자 득달같이 벌어진 일이다. 빌고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은행에서 더는 대출할 수 없었던 김씨가 생활고를 못 이겨 대출업자에게 빌린 돈은 20만 원. 일주일 뒤 40만 원(연리 4,562%)으로 갚는 조건이었다. 6개월 뒤 갚아야 할 돈은 4,000만 원으로 불었다. 김씨는 "대출 심사에 필요하다고 받아 간 네이버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이 협박에 쓰일 줄 몰랐다"고 했다. "업자가 딸 친구 엄마한테 전화하는 바람에 딸 친구들도 우리 사정을 알게 됐다"며 "빚쟁이 딸이란 놀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호소했다.
한국일보가 최근 주부, 직장인, 무직자, 사업체 대표 등 불법 사금융 추심 피해자 10명을 만나 피해 상황과 범죄 수법을 알아봤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약자의 피를 빠는 악질적 범죄"라고 지목했던 불법 사금융의 악성 추심은 정부를 비웃듯 여전히 활개치고 있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서 급전(대출), 소액대출을 검색해 '대출OO' 등 대출중개 플랫폼을 통해 불법 사금융 업체를 접했다. 전화와 카카오톡 등 비대면으로 대출 과정이 진행되다 보니 정식 대부업체인지 불법 업체인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업체들은 한 번에 수백만 원을 빌려주지 않는다. 20만 원을 빌려주고 일주일 후 40만 원을 갚으면 한도를 늘려 준다는 식이다. 목돈이 필요한 피해자들은 어쩔 수 없이 원금의 2배에 달하는 이자를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주일 단위로 '30만 원 대출에 50만 원 상환', '50만 원 대출에 80만 원 상환' 등 찔끔찔끔 한도를 올린다. 피해자는 이자만 갚다가 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업체들은 대출금이 필요한 이들의 처지를 악용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다. 대출 한도 등을 확인한다며 연락처, 카카오톡 대화 내용, 네이버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정보는 추후 대출금을 갚지 못할 경우 협박을 위한 수단이 된다.
'싱글맘' 이모씨는 성착취 추심 피해자다. 신용 이력이 없어 일반 대출이 불가(신파일러)한 이씨는 아이 때문에 급전이 필요해지자 30만 원을 빌려 50만 원을 갚는 것으로 사금융에 발을 들였다. 비슷한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갚아야 할 돈이 2,200만 원으로 늘었다.
'대출 돌려막기'로도 상환이 어려워지자 업자는 이자를 깎아 준다며 통장 사본을 요구했다. 사본을 건네받은 업자는 "대포통장을 제공한 사실을 경찰에 알리겠다"며 나체 사진을 요구했다. 이씨는 "경찰서 문 앞까지 갔다가 '너도 콩밥 먹인다'는 협박이 떠올라 돌아온 적도 있다"고 했다. 이씨는 나체 사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상환 날짜에 돈을 갚지 못하자 업자는 이씨 지인들이 볼 수 있도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체 사진을 올렸다.
30대 직장인 박모씨는 본인이 찍지도 않은 나체 사진이 유포되는 피해를 당했다. 박씨는 "말도 안 되는 이자라 못 갚았는데, 카카오톡 단체방에 지인을 모두 초대해 내 얼굴과 남성 주요 부분을 합성한 사진을 뿌렸다"며 "죽고 싶다는 말이 체감됐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에게 이자가 수천%에 달하는 불법 대출은 무효라는 정부 조언은 와닿지 않았다. 개인정보라는 약점을 쥐고 있는 업자들의 쉴 새 없는 전화는 공포 그 자체다. 법은 멀고 협박은 가까운 셈이다. 이 같은 불법 사금융을 이용한 인원은 지난해만 약 80만 명, 이 중 불법 추심에 시달린 인원은 8만 명으로 추산(금융위원회)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대출 문화가 정착하면서 불법 추심 수법은 악랄하게 진화하고 있다. 가명과 대포폰, 대포통장으로 무장한 일당은 해외 SNS를 이용하면서 법망을 피해 다닌다. 10년 전만 해도 집에 온다거나 주변인 몇 명에게 전화로 협박하던 불법 추심은 이제 SNS를 통해 몇 초 만에 수백 명에게 피해자 나체 사진을 전송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경찰 관계자는 "텔레그램이나 카카오톡 등 전파력이 강한 SNS에선 가해자 특정이 쉽지 않다"며 "순식간에 피해가 번지는 데다 온라인에서 계속 전파되는 양상이라 피해자 회복도 과거보다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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