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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의 바다가 물결처럼... 천년의 피땀 700 층층 다랑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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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성 서남부 리수이(麗水)는 ‘산소 도시’로 유명하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첩첩 산중이다. 천년 역사를 지닌 마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하나씩 정체를 드러낸다. 경기도 면적보다 넓은 1만7,300㎢에 절경과 고촌으로 넘친다. ‘강남 최후의 비경’이란 별명을 그냥 얻지 않았다. 리수이 곳곳을 찾아간다. 송나라 시대 명요(名窯)가 있는 룽췐(龍泉)의 중국청자소진(中國青瓷小鎮)부터 시작한다.
삼국시대부터 도자기를 생산했다고 하니 천년을 두 번이나 지난 역사다. ‘중국’을 앞세울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다. 입구에 적힌 ‘세계공향(世界共享)’은 명성을 자랑하고 싶은 뜻이다. 공예품 및 도자기 가게와 식당을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가서 알았다. 진품 도자기를 보려면 생산지가 아닌 박물관으로 가야 했다. 한마디로 실망이고 입장료가 아깝다. 유명세에 힘입어 의욕을 부렸으나 알맹이는 없다.
룽췐 가마를 가요(哥窯)라 한다. 도자기 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남송 시대에 장생일과 장생이 두 형제가 도자기를 구웠다. 주로 청자였으며 형제의 가마를 가요와 제요(弟窯)로 나눠 불렀다. 두 도자기 모두 개성이 강했는데 형이 훨씬 더 유명했다. 튼튼하면서도 달걀껍데기처럼 얇고 유약이 풍성하다는 설명이 보인다. 도자기 굽는 과정도 있는데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조잡하다. 그저 두 형제의 대가다운 청자사조(青瓷師祖) 조각상에 눈길을 맞춘다.
룽췐 시내에 있는 청자박물관을 찾아간다. 현 단위 도시라 큰 기대 없이 들어선다. 웅장한 건물만큼 전시 공간도 넓고 다양한 도자기가 진열돼 있다. 도자기 제조과정을 모형으로 꾸며 놓았다. 흙 고르는 취토(取土)를 시작으로 유약을 바르는 시유(施釉)까지 설명돼 있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이다. 가마에 넣고 불을 피우고 빼내는 과정도 실감 나게 꾸몄다.
푸른빛 감도는 송나라 도자기를 보니 가슴이 설렌다. 청자의 품위를 예쁘장하게 포장한 모양새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몸체와 구멍이 다섯인 오관병(五管瓶)이 탐스럽다. 촛대 또는 꽃병이라 하는데 명확하지 않다. 무덤에서 자주 출토되는데 곡식 담는 그릇으로 추정한다.
꽃문양을 새긴 긴 목의 장경개병(長頸蓋瓶)도 일품이다. 연꽃과 파초가 보이고 잎사귀에 빗살이 그려져 있다. 봉긋한 원뿔 모양의 덮개까지 완벽하다.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청록색으로 반짝거리는 박 모양의 집호(執壺)를 고르고 싶다. 어떤 술을 담아도 ‘최고의 한잔’을 부르는 술병이라 할만하다.
청색 유약을 바른 수주(水注)도 있다. 길이는 10.9cm이며 구멍 안 너비는 8.4cm, 높이는 7.1cm다. 물 나오는 부위가 콧구멍 같은 연적이다. 청회색으로 은은하다. 손아귀에 쏙 들어올 듯하다. 물방울이 쪼르륵 벼루에 떨어지면 천년의 소리를 타전할 듯하다. 검은색 사이에 흰색이 끼어든 모양의 도자기가 보인다. 술병도 아니고 제기도 아니다. 이름이 사투(渣鬥)다. 찌꺼기와 싸움이라니 이상하고 야릇하다. 보통 타호(唾壺)라 하며 차 마시고 난 찌꺼기를 모으는 용구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윈허(雲和) 현이다. 저장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다랑논이 있다. 계속 오르막을 달린다. 1,200m의 고도 차이가 난다.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에 농토 마련을 위해 개간했다. 700층 이상이 되는 논밭이다. 천미천년천층(千米千年千層) 다랑논이라 부른다. 사진작가의 낙원이라는 구곡운환(九曲雲環)에 도착한다. 운무가 남다르며 구름이 떠다니는 세상이란 찬사까지 있다. 다랑논은 계절과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설렘과 걱정이 앞선다.
10분가량 걸으니 서서히 다랑논이 보인다. 골짜기에도 빈틈없이 토양을 어루만진 흔적이다. 비가 줄곧 왔던지 샘솟듯 물이 쏟아지고 있다. 나무 계단 따라 기슭을 둘러가니 전망대가 나온다. 먼산을 바라보고 시선을 아래로, 다시 가까이까지 바라본다. 가지런히 정돈된 논두렁이 물결치듯 흐른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둘러봐도 다 푸릇푸릇하다. 700개의 층계가 그저 한 몸처럼 보인다. 천년 세월을 노동으로 가꾼 피땀까지 그저 하나는 아닐 터이다. 가족의 입을 달래 주던 삶의 질곡이 전율로 느껴진다.
골짜기도 다랑논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쇠스랑과 곡괭이로 일구고 허리와 무릎으로 양식을 창조하는 농부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두렁마다 연륜과 곡절이 숨겨져 있다. 늦여름의 빛깔을 담고 있다. 다랑논의 여름은 녹색 비단이 펼쳐진다고 했다. 벼의 바다가 물결처럼 흐른다는 말이다. 봄에는 꽃 적삼을 두르고 층층이 물이 충만하다. 겨울에는 은빛 갖옷이라며 눈 담요로 소복하다고 표현한다.
가을은 붉은 치마로 비유한다. 금빛 이삭이 수놓는 계절이다. 가을에도 구곡운환에 간 적이 있다. 두 계절을 비교하니 정말 다르다. 이렇게 확연하게 다른 감상으로 나타날 줄 몰랐다. 운무도 잔뜩 날아다니고 가랑비도 솔솔 내렸다. 금빛인지 핏빛인지 모를 가을 다랑논은 황홀경이다. 봄과 겨울에 갈 일이 남았다.
원허 남쪽에 징닝서족자치현(景寧畲族自治縣)이 있다. 저장에 소수민족이 있다니 뜻밖이다. 인구 70만으로 저장과 광둥, 푸젠에 주로 거주한다. 서향지창(畲鄉之窗)이란 별명을 지닌 다쥔고촌(大均古村)으로 간다. 시냇물이 마을을 보듬고 휘돌아 나간다. 당나라 후기부터 수륙 교통의 요지였다. 운무 잔뜩 휘감은 산과 반영을 이룬 풍광이 아름답다. 천혜의 환경과 오랜 역사를 지닌 서족 마을로 들어간다.
길이가 겨우 500m인 마을이다. 이슬비가 내려 촉촉하게 젖었다. 가옥을 개조한 식당과 객잔이 많다. 성수기나 축제가 되면 성황을 이루는 듯하다. 자수 놓은 옷감이나 공예품 파는 가게도 있는데 한적하다. 담장에 민속 풍습을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서족은 청남색(青藍色)을 즐겨 입는다. 붉은 옷차림을 한 혼례 장면이 보인다. 세 가닥으로 곧추세운 은 장식을 머리에 이고 있다. 고깔모자 같다. 이마와 두 귀 사이로 구슬 구르듯 주르륵 흘러내린 모습이다. 미모를 부추기는 장식이다.
왜 세 가닥일까? 가옥 기둥에서 해답을 찾았다. 기둥을 옆으로 보니 알록달록하게 꾸민 4개의 글자가 보인다. 신화 속으로 간다. ‘후한서’에 고신씨(高辛氏) 시대에 털이 많은 개 반호(盤瓠)가 등장한다. 남방 소수민족의 시조로 많이 등장한다. 축생을 시조로 하는 수조신화(獸祖神話)다. 서족의 시조 반호가 왕을 도와 외환을 물리치고 셋째 공주와 결혼했다. 삼공주(三公主)라 세 갈래다. 반호는 금종(金鐘)을 쓰고 견디고 멋진 사내로 탄생한다. 둘은 깊은 산에 은거하며 3남 1녀를 낳았다. 기둥에 자녀의 성(姓)이 적혀 있다. 장남이 반(盤), 차남은 남(藍), 셋째는 뇌(雷), 넷째 딸은 종(鍾)이다.
사당이 문을 닫아 약간 서운하다. 폭죽 터트린 흔적이 있는 부산사(浮傘祠)가 보인다. 당나라 시대에 베틀을 짜서 집안을 돌보며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한 마씨 부인이 있었다. 어느 날 다쥔촌을 지나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났다. 우산을 띄워 강을 건넜다는 미담으로 이어져 마선(馬仙) 신앙이 됐다. 이씨종사(李氏宗祠)의 열리지 않는 문을 한참 바라다본다. 명나라 시대에 이종이 진사에 올랐다. 동생과 아들도 나란히 진사에 오른 명망가 집안이다.
청나라 말기 갑부인 이개원의 고택이 열려 있다. 정문에 북극동운(北極彤雲)이 보인다. 북극성에서 붉은 구름처럼 빛을 뿌리니 운수가 대통이란 뜻이다. 복록수(福祿壽)와 함께 희(喜)도 새겼다. 인물과 꽃도 도드라진다. 안쪽 문에도 글자를 새겼다. 건물을 낙성할 때 자주 사용하는 죽포송무(竹苞松茂)다. 아래로 대나무처럼 견고하고 위로 소나무처럼 치밀하다는 뜻이다. 위아래 형제가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로 변환해도 된다. 가문이 번창하라는 메시지다.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서족은 자칭 산하(山哈)라 부른다. 산속 깊이 찾아온 손님이란 뜻이다. 민족 이름인 서(畲)는 땅을 파고 씨를 뿌린다는 말이다. 당나라 시대부터 서족 조상이 살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훨씬 오래전부터 어디선가 거주하고 있었으리라. 골짜기 물 많은 땅에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1956년 소수민족으로 정식 확정됐다.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다. 대륙에서 천년 이상 살아오며 자기만의 풍습과 종교를 지닌 민족이 얼마나 많던가? 겉핥기라도 했으니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편하다.
북쪽으로 100km를 이동하면 쑹양(松陽)이다. 리수이에서 진정 ‘최후의 보루’ 같은 비경이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즈넉하고 양지바른 마을이 교통이 발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오랫동안 때 묻지 않고 순박한 전원 풍경을 지닌 마을이 수두룩하다. 우징촌(烏井村)에 있는 황가대원(黄家大院)으로 간다. 마두장이 머리를 치켜들고 뻗었고 멀리 운무에 쌓인 산세가 깊어 보인다.
평원이 있어 저장 남부의 곡창 지대다. 청나라 동치 시대에 풍요로운 땅을 기반으로 성장한 거상 황중화의 저택이다. 연초 사업으로 돈을 벌고 3대까지 갑부였다. 담장이 높아 마치 요새 같다. 3대째인 1918년에 목조 예술의 전당이라 불리는 백수청(百壽廳)을 세웠다. 172개나 되는 나무 기둥을 세웠으니 웅장하기 그지없다. 용과 봉황이 신비한 모양으로 조각돼 있다. 무엇보다 내민보(벽이나 기둥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보)와 까치발에 목숨 수(壽)를 200자 넘게 새겼다. 글자의 서법이 하나도 같지 않다고 한다. 상상 이상이다. 도대체 어디에 다 숨었는지 세다가 그만둔다.
광서 시대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1898년 아들 황소계가 창고를 열어 쌀을 내놓았다. 선행을 실천한 공로가 사뭇 컸다. 금빛 도금된 택주인속(澤周仁粟)은 관청이 내린 포상이었다. 어진 마음으로 곡식을 풀어 두루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자고로 공동체와 더불어 사는 상인이라면 이런 미덕 하나씩은 달고 있다.
5칸 건물인 무기루(武技樓)가 나온다. 양쪽 곁채에 낯뜨거운 상처인 ‘만세’가 새겨져 있다. 항일 전쟁 시기와 일제 점령기에 사무실로 사용했다. 해방 후 학교였다가 1950년대 말 기층 조직인 인민공사의 거주지였다. 구호를 새기려고 지운 역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창문에 상징과 해학이 넘치는 문양이 수두룩하다. 아이들 노는 모습, 무술 연습, 서커스 장면도 있다. 앙증맞게 원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박쥐, 나비, 물고기와 함께 쥐 한 쌍이 두 눈 부릅뜨고 있다. 주인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어도 선행을 베푼 상인의 뜻이 고스란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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