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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서 '번아웃' 고향 제주서 '주 4일' 삶의 여유 찾은 김기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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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에서 앞만 보고 생활했죠. 사업은 성공했지만, '번아웃' 됐어요. 그때 고향인 제주도가 안식처가 돼 줬습니다.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죠."
수도권에서 중고생 대상 영어학원을 운영했던 김기성(46)씨는 2년 전 사업을 접고 고향 제주도에 정착했다. 매일 밤 늦게까지 일에만 몰두하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제주에서 나름 '안식년'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됐다. 19일 만난 그는 초등학생인 두 아이들이 집 앞 바닷가에서 물놀이하고, 앞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고, 애완견과 산책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삶의 질이 다르다"고 자랑했다. 지난해 문을 연 학원도 순항 중이지만, "젊었을 때와 달리 큰 욕심부리지 않고 '주 4일' 일해 여유를 되찾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고교 졸업 후 25년간 줄곧 서울과 경기도에 근거지를 두고 생활해왔다. 학창시절엔 수영 선수였다.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부상으로 고교 1학년 때 중단하고 뒤늦게 학업으로 눈을 돌렸다. 경기 수원의 한 대학에 입학한 1997년 고향을 떠났다. 경영학을 전공해 남들처럼 기업에 취업했지만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안정적인 직업의 중요성을 깨달아 교사가 되기로 하고, 서울의 사립대에 편입해 영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교사가 되려면 무조건 수도권에 있어야 했다. "임용고사로 선발하는 영어 교사 인원이 서울은 매년 10명 안팎에 불과해 언감생심이었고,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80~200명가량 됐어요. 신도시가 생겨 인구가 늘고, 학교도 신설하니까 그만큼 많이 뽑았는데도 사범대 졸업생 대부분 경기도로 몰리니까 수십 대 1의 경쟁률은 기본이었죠."
바늘구멍인 임용고사 문턱을 넘지 못한 그는 안양의 명문 외고에서 2년간 기간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잘 가르친다'는 평가를 받고 학교에서 정규직 전환 제안도 받았지만, 늦깎이라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수원에 직접 중고생 대상 영어학원을 차렸다. 학원은 경쟁이 치열한 수원에서도 8개월 만에 수강생이 230명에 달할 정도로 잘됐다. 그는 "당시 토익 토플 등 공인영어시험 성적만 좋아도 대학 입학이 가능한 제도가 확산되면서 그 수요가 늘어난 점을 공략했던 것이 주효했다"며 "수강생이 밀려들어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밤늦게까지 일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토플 만점(120점)자로, 삼성전자와 경찰대, 경기도공무원연수원 등에서도 강의했다.
욕심이 생겨 2014년쯤 인천 신도시인 청라에도 개원했다. 매일 집(동탄)에서 승용차로 왕복 2시간씩 출퇴근했다. 이곳도 교육열이 높아 수강생이 100명가량 됐다. 이날 제주로 김씨를 찾아온 옛 제자는 "귀에 쏙 들어오는 강의가 큰 도움이 됐다"고 기억했다.
시장이 큰 수도권에 자리 잡은 덕분에 사업은 잘됐지만, 탈이 났다. "주 6일 일했어요. 아침 7시 출근해 저녁 9시, 10시쯤 일 마치고 귀가하면 밤 11시를 넘기기 일쑤였죠. 너무 힘들어 가족과 인천으로 이사해 2년 정도 거주했는데도 벅찼어요. 심리적으로도 나만의 시간과 여유가 없는 데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어요. '번아웃' 된 거죠. 자신을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늘리고 싶었어요."
2018년쯤 청라 학원을 정리하고, 주말엔 쉬었다. 한동안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여행으로 찾았던 제주도가 눈에 들어왔다. 유년시절을 보낸 향수와 고향의 넉넉함이 그를 품었을 터. "자주 오자"는 생각으로 2019년 6월 서귀포 바닷가에 조그만 구옥을 마련해 리모델링했는데,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사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2020년 제주도에서 한달살이 할 때 아이들이 매우 좋아했어요. 표정이 달랐죠. 저도 덜 치열하고, 여유롭고, 심신이 안정됐어요. 코로나19로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맞출 정도로 실적이 악화하니까, 오히려 '쉬엄쉬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수업을 몰아 주말마다 서울을 오갔는데, 지인에게 학원을 넘기고 2022년 전 가족을 설득해 아예 내려왔어요."
삶의 질이 달라졌다.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여 가슴이 탁 트인다. 마당에서 가족끼리 삼겹살 파티를 하고, 여름엔 집앞 바닷가에서 피서를 즐긴다. 수도권에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
작년엔 제주시에 학원도 개원했다. 학교 교사와 수도권에서의 교육 경력은 가장 큰 자산이자 경쟁력. 게다가 운동선수 회사원 사업 등 다양한 직업을 통해 쌓은 경험은 학생들 가르칠 때도 큰 도움이 된다.
"제주도는 서울과 수도권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사람들이 여유 있는 편인 반면, 고립된 섬 지역 특성상 (많이 개선됐지만) 다소 폐쇄적인 편이에요. 제가 겪은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에게 다양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해요. 외지인이 아니라 동향인데다 다양한 이력을 지닌 제가 이런 조언을 해주니까 학생도 수용해요. 수도권과는 또 다른 면이죠. 제주 학생들이 비록 섬에 있지만, 마음은 넓고 큰 포부를 지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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