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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매일 사다 보니 2만 권...그 남자의 아파트엔 사람 없이 책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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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서가를 보면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보인다. 책등을 보기만 해도 내가 그 책을 사서 읽던 시기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책 좀 모으는 사람들 중엔 '고양이 빌딩'이라는 서재를 가진 일본의 독서광 다치바나 다카시를 선망하는 이들이 꽤 있다. 다치바나는 무려 20만 권의 책을 보관하기 위해 일본 도쿄 시내에 빌딩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 지하 2층, 지상 3층 높이 서재를 채운 책은 한 개인의 인생이자 시대의 지적 풍경으로 통한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서가라는 것은 재밌는 물건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블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때그때의 생각을 모은 결과다."
범인의 눈에는 별 감흥 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애서가들에겐 다른 모양이다. '바갈라딘'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출판인 박태근(43) 위즈덤하우스 본부장은 실로 어마어마한 다치바나의 서재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를 롤모델로 삼기라도 한 것일까. 책 2만 권을 소유한 장서가인 그는 2년 전 책으로 가득 차 1인분의 살림도 들일 공간이 없는 집에서 피신 나와 새로 거처를 얻었다. 그에겐 책으로 채운 빌딩은 없지만 책만 사는 집이 있다. 사람 없이 책만 살고 있다는 별난 집의 실체가 궁금해져 인천에 있는 '책 집'의 문을 두드렸다.
30년 된 아파트의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방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공간이 나왔다. 인문·사회·심리·과학·예술 분야 책 1만5,000여 권으로 빈틈없이 엮인 그 공간을 단순히 '서재'라 칭하는 것은 어쩐지 부족하다 싶다가도 책집(書齋)의 문자적 의미에 이보다 잘 들어맞기도 쉽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활의 흔적을 지워버릴 정도로 책의 더께가 쌓인 서재의 주인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책 주인마저 쫓아낸 '저세상' 서재의 기원은 박 본부장의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경기 하남의 외진 동네에서 당시 유일한 서점을 들락거리며 책과 조우했다. 몇 년 후 시립도서관이 생기면서 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그때 도서관에서 받은 충격이 생생해요. 이 세상에 단행본과 잡지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죠. 매월 이렇게 새롭고 재밌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어요."
활자 세계에 빠져 10대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가선 '논장' '풀무질' 같은 사회과학서점들을 만났다. 그즈음부터였다. 출석 도장 찍듯 매일 서점에 들러 한두 권씩 책을 사모으기 시작한 것이.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다시 가서 사 왔을 정도였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마음에 드는 책을 언제나 곁에 두고 싶었거든요."
책은 길이었다. 책을 만들고 싶어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편집자로 일한 지 3년 7개월이 됐을 때 우연히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상품기획자(MD)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합격했다. 온라인 서점이 막 성장하기 시작한 때였다. 수백 권 신간을 주문 판매하며, 출판사·독자와 소통하는 MD의 업무란 책에 대한 거의 모든 일에 가까웠다. 한 달에 최소 50만 원을 책을 사는 데 지출했고, 서재의 책은 무한 증식했다. MD 생활 11년 4개월 만에 그의 집은 방 구분이 무색하게 사방의 책장을 이중으로 채우고도 바닥에 책 산이 수북이 쌓인 공간으로 변했다.
한동안 책 집사로 얹혀살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뛰쳐나왔다는 박 본부장은 책만 남은 집에 대해 "거창한 의미와 맥락은 없다"고 멋쩍어하면서도 "서가가 여러 분야로 영역이 나뉘는데, 지금 봐도 책을 어떤 생각으로 골랐는지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한낱 작은 책에서 고구마 줄기처럼 사연을 뽑아내는 모습이 열정적인 책 수집가다.
1만5,000여 권의 책은 가정집을 순식간에 책방으로 만들어버렸다. 혼자 사는 서울 집, 부모님이 살고 있는 본가, 사무실 서가에 흩어진 책까지 모으면 족히 2만 권이다. 두 겹으로 책이 들어찬 책장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책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는 강박이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오히려 그 반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책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은 전혀 없어요. 책 수집이 목적이었다면 책을 이렇게 방치하지 않았겠지요. 책을 모으려고 사기 시작한 게 아니라 사다 보니 쌓인 거예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어요."
왜 이렇게까지 책을 사는 걸까. 텍스트보다 이미지를 소비하고 독서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그야말로 책의 종말이 머지않은 것 같은 시대에 매일같이 종이책을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맥쩍은 일이 아닌가. 게다가 매월 50만 원 이상이 책값으로 나가니 아까울 법도 한데, 박 본부장은 "괜한 사명감 때문"이라며 웃어넘겼다. "저는 직업적으로 책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책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책 한 권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을 생각하면 외면할 수가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책을 묵묵히 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명감의 바탕은 책을 만드는 이들을 향한 '존중'이다. 좁은 시장에서 확산이 불가능한 언어로 책을 만듦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나오는 신간이 200권, 일 년이면 6만 종 이상의 책이 쏟아진다.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책들이 있어요. 그런 책을 보면 응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세상에 상투적인 책은 없어요." 그의 서가엔 2쇄를 찍지 못한 초판이 가득했다. 이미 품절, 절판돼 영영 자취를 감춰버린 책들이다. 어쩌면 그가 수고로이 구축한 서재는 한솥밥을 먹는 동료들, 사라져 버릴 책들을 위한 마음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박 본부장에게 넘치는 것은 책이요 부족한 것은 공간이다. "2년 전 집을 구해서 거처를 옮긴 건 '더 이상 책을 쌓아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계기였어요. 돈을 버는 동안은 계속 책을 사겠지만 적어도 책을 쌓아 두지 않고 흩어지게 할 작정이에요.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집은 서재를 1,000권으로 제한했고, 사무실에도 서가를 하나 만들어서 누구나 책을 빌려 볼 수 있게 했어요." 그렇다면 책 집의 운명은?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단다. 언젠가 아파트가 허물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어떻게든 처분할 작정이다.
자신을 편집자로 규정하며 살아왔다는 박 본부장은 다시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2년 전부터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의 인문사회 분야 출판 전반을 관리하고 있다. 인기 대중서를 다수 펴낸 출판사에서 사회적 의미를 묻는 진지하고 유쾌한 인문사회서적을 만드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슬슬 다음 스텝이 궁금해졌다. 끝내 다다르고 싶은 종착지를 묻자 즉각 돌아온 답변. "출판 행정이에요. '스포츠 행정'이라는 분야가 있잖아요. 축구 선수가 현역에서 은퇴한 뒤 공공서비스에서 전문성을 펼치는 것처럼요. 업력이 쌓일수록 책의 공공성,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출판에서 공동체의 언어를 회복하고 공공성을 되살리는 일을 공공서비스 관점에서 풀어내는 것이 남은 과제예요. '책은 무해하다'는 저의 신념과 연결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그는 요즘 그 믿음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슬쩍 고백했다. "오랫동안 출판이 공공재라는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는데 요즘엔 그렇게 믿어도 되는지 의구심이 생겨요. 공공성과 시장성 사이의 무게 추가 흔들리고, 때로 독자를 기만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요. 모든 건 본질을 지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지키는 것이 출판의 지속가능 전략일 거예요."
박 본부장의 말들을 곱씹어보니 지금의 그와 그의 서재를 만든 무수한 발자국은 한마디로 수렴됐다. '책은 무해하다'는. 자신과 책의 접점을 찾아 편집자로, 베테랑 MD로 활동한 것이나 팟캐스트 '뫼비우스 띠지'를 만들어 출판 노동 문제와 출판사 내 성희롱 등 출판계 어둠을 고발한 것, 라디오 출연, 서평 쓰기 등 책과 관련한 모든 활동에 의미를 부여해 온 것 모두 그런 맥락일 터다. 책의 세계에서 빛과 어둠을 두루 살피며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려는 모습을 그의 눈에서, 그의 서가에서 본다. 책이라는 무해한 세계는 그렇게 지켜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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