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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한 눈꽃·얼음꽃… 겨울이어서 찬란한 3가지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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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까지 맑은 바람이 불었다. ‘뎅그렁’ 풍경 소리가 한동안 맴돌이한다. 수정보다 맑은 얼음꽃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렸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제맛이 난다. 해발 고도가 높아 한여름 피서지로 널리 알려진 대관령 일대는 겨울이면 더 찬란하다. 각기 색다른 매력을 지닌 평창의 세 개 숲길을 걸었다.
깨달음은 조용한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불가에서는 일상의 가벼운 산책으로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걷기 명상도 깨달음에 도달하는 좋은 방법이라 가르친다. 오대산 자락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약 10km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선재길’이 있다. 한 방향만 보고 치닫는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뒤꿈치에서 발끝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온전히 걷는 것에만 집중하는 깨달음의 길이다.
길 이름은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재동자’에서 따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53명의 선지식(지혜와 덕망을 갖추고 다른 사람을 교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승려)을 차례로 찾아갔는데,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진리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젊은 구도자다. 선재길 안내판에는 보현보살 대신 문수보살이라 적혀 있다. 서기 643년 중국에서 문수보살을 헌신하고 돌아온 자장율사가 처음 길을 연 이래 수많은 수도자가 걸었다고 소개한다. 그대로라면 무려 1,400년 가까이 된 구도의 길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보살이니 궁극의 가르침에 차이는 없을 듯하다.
길은 대체로 순탄하지만 왕복 20km는 아무래도 무리다. 농어촌버스가 KTX진부역에서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까지 하루 10차례 왕복한다. 월정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버스로 상원사로 이동해 걸어서 내려와도 되고, 상원사까지 걸어갔다가 버스로 되돌아와도 된다. 두 사찰 사이에는 민가가 없지만 버스정류소는 7곳이 있다. 시간표를 확인하고 일부 구간만 걷는 것도 방법이다.
월정사 경내를 벗어나면 도로 건너편에 바로 ‘선재길’로 들어서는 작은 교량이 나타난다. 겨울 선재길의 매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이다. 길은 그늘진 숲길로 이어지고, 두꺼운 얼음에 눈 쌓인 계곡이 하얗게 눈부시다. 잎 떨어진 겨울 숲은 홀가분하고, 나무는 간결하다. 새들마저 떠난 계곡에 얼음장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하다. 옛날 구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홀로 조용히 걸어도 괜찮고, 길동무와 동행해도 좋은 길이다.
이 길이 심심하지 않은 것은 사람 사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월정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산림철길’ 표지판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오대산의 울창한 산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상원사까지 협궤 철길을 깔고, 해방 전까지 소나무 박달나무 참나무 등을 벌목해 강릉 주문진항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했다고 한다. 바로 위 제재소 터는 당시 벌목 노동자와 화전민이 살던 마을이다. 이곳 버스정류장 명칭은 지금도 ‘회사거리’다.
중간쯤에서 선재길은 ‘조선사고길’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다. 인근 계곡 산 중턱에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관하던 오대산사고가 있었다. 실록각·선원각·별관 건물과 함께 사고를 지키는 수호 사찰로 영감사가 있었고, 참봉 2명과 군인 60명, 승려 20명이 사고를 관리하고 지켰다고 한다. 물·불·바람의 해가 없는 상서로운 곳을 택했다지만 인재는 피할 수 없었다. 오대산사고본은 일본으로 반출돼 거의 불에 타고 말았고, 건물도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현재는 1992년 복원한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선재길에는 섶다리, 조개골, 동피골 등 과거 사람들의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거제수나무, 전나무도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어 유명한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따로 걷지 않아도 된다.
발왕산 정상의 ‘천년주목숲길’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접근이 쉬운 길이다. 해발 1,458m 정상 능선까지 모나용평(용평리조트)에서 관광케이블카(왕복 2만5,000원)를 운행한다. 지난 12일 오전, 케이블카는 삭막한 회색 숲 상공을 가르며 천천히 꼭대기로 올랐다. 설경은 고사하고 상고대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겼는데, 상부정류장에 다다르니 반전이 펼쳐진다.
무채색 겨울 숲이 서서히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정상에 다다랐을 때에는 완전히 딴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온통 눈꽃과 얼음꽃이다. 공중에 흩날리던 눈이 엉겨 붙고, 산자락을 어슬렁거리던 습기가 얼어붙었다. 가지마다 아롱진 눈과 얼음이 수정보다 투명하고 햇살보다 눈부시다.
천년주목숲길은 케이블카 상부정류장에서 주목 군락을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는 고산 산책로다. 약 2km, 전 구간이 목재 덱이어서 부지런히 걸으면 30분 정도면 돌아볼 수 있지만, 눈부신 설경에 발걸음이 한없이 늘어진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나무가 ‘얼음 화석’으로 변해 있다. 발왕산 주목 군락에는 최고 1,800년으로 추정되는 ‘아버지왕주목’을 비롯해 키 6~16m에 이르는 260여 그루의 주목이 자라고 있다.
제법 큰 나무에는 모양에 따라 어깨동무나무, 삼두근주목, 고뇌의주목, 고해주목 등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을 걸 친절이 과하다. 이름 붙인 주목을 지날 때면 갑자기 스피커에서 음성해설이 흘러나온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겸손하고 숙연해진 분위기가 일순간 흐트러진다. 과유불급이다.
천년주목숲에 주목만 있는 건 아니다. 산목련·귀룽나무·마가목·엄나무·산사나무·시닥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섞여 있다. 발왕산 눈꽃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들 잎 떨어진 나무 덕분이다.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발왕산 정상까지는 약 500m, 꼭대기에서는 얼어붙은 나뭇가지 너머로 선자령을 비롯해 눈 덮인 태백 준령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대관령면 횡계리 산 2-33번지.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바로 아래에 ‘국민의숲’이 있다. 이름과 달리 정작 평창에서도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화전민이 경작하던 밭에 다양한 수종을 심어 가꾼 숲이다.
대관령 산자락은 과거 대부분 황폐한 민둥산이었다. 해발 800~1,000m 고지대여서 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기온차가 크고 겨울철 적설량이 많아 식물이 자라기에 열악한 환경이다. 더구나 일제강점기 목재 수탈에 이어 화전을 개간하며 산은 급격하게 황폐해졌다.
1975년 영동고속도로를 개통하며 숲을 복원하기 위한 계기가 마련됐다. 고속도로 주변 산림녹화계획에 따라 1978년부터 11년간 조림사업이 지속됐다. 이른바 ‘대관령 특수 조림’ 사업이다. 망가진 숲을 되살리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동부지방산림청에 따르면 1차 연도의 일반 조림은 실패했다. 동해안과 영서지역에서 불어오는 강하고 차가운 바람이 곧바로 어린 나무를 뒤흔들어 생장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뿌리가 뽑혀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듬해부터는 논흙 90톤을 산꼭대기까지 옮겨와 구덩이에 채운 다음 나무를 심었다. 약 5km에 걸쳐 높이 3m 높이의 방풍책을 설치하고, 싸리나무로 통발을 만들어 어린 나무를 감싸고,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지주목을 댔다.
대관령의 기후를 감안해 전나무·잣나무·독일가문비나무·낙엽송 등 아한대 수종이 선택됐고, 사이사이에 오리나무와 자작나무를 심었다. 죽거나 성장이 느린 나무는 캐내고 새 나무를 다시 심었고 비료 주기, 덩굴 제거, 풀베기와 솎아내기가 지속됐다. 이렇게 정성 들여 가꾼 84만여 그루의 나무는 이제 평균 높이 15m, 가슴높이지름 26cm(10~38cm)의 청년 숲으로 성장했다.
국민의숲 산책로는 약 5km, 큰 오르막이나 내리막 없이 순탄해 1시간 30분 정도 잡으면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다. 도로변에 차량 10대가량 댈 수 있는 주차장(대관령면 횡계리 670)이 있다. 숲길 산책의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바닥에 한번 쌓인 눈은 완연한 봄이 오기 전까지 녹지 않는다. 겨울 산행은 아이젠이 필수다.
주차장에서 이정표를 따라 조금 오르면 가장 먼저 낙엽송 숲을 통과한다. 잎을 훌훌 털어내고 하늘 높이 솟은 나무줄기가 알싸한 바람에 설렁설렁 흔들린다. 잡념이 사라진 머릿속에도 맑은 바람이 분다. 무념무상으로 눈 덮인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면 곧장 독일가문비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눈부신 대낮에서 어둑한 새벽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듯하다. 귓전을 때리던 바람도 무성한 가지를 통과하지 못해 그늘진 숲이 오히려 포근하다. 바닥에 나부끼는 눈가루가 간간이 새어 드는 햇살에 부서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겨울 나라로 들어가는 듯하다.
가문비나무 조림지를 벗어나면 ‘자작나무숲’ 이정표가 보인다. 눈보다 새하얀 순백의 자작숲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럽다. 산책로는 자작숲을 먼발치로 돌아간다. 상록수 사이 듬성듬성 하얀 줄기만 확인될 뿐이다. 낙엽송 숲을 통과해 되돌아 나오는 길, 주차장 주변 바닥에 깔린 눈가루가 바람에 날린다. 들어갈 때 찍었던 발자국이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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