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인공들은 지방에서 사랑하고 성장한다...'탈서울 청춘물' 전성시대

입력
2024.01.16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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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삼달리''모래에도 꽃이 핀다''소년시대'...
주역들 모두 수도권 밖에서 사랑하고 성장
한 달 새 공개된 청춘드라마 과반이 '탈서울'
"서울서 제대로 사랑·성장할 수 없다는 좌절감"
배우들 1년간 사투리 배우고 촬영기간 늘어지기도
지방엔 농고와 공고만? '지역 비하' 주의해야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청년 삼달(신혜선, 오른쪽)은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가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려 한다. SLL 제공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청년 삼달(신혜선, 오른쪽)은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가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려 한다. SLL 제공

요즘 화제인 세 드라마 JTBC '웰컴투 삼달리', ENA '모래에도 꽃이 핀다', 쿠팡플레이 '소년시대'엔 공통점이 있다. 10~30대 청년이 주인공이고, 서울이 아닌 지역을 주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 '탈(脫)서울 청년드라마'인 셈이다.


탈서울 청춘드라마 전성시대

'웰컴투 삼달리'는 18년 동안 서울에서 산 삼달(신혜선)이 고향 제주로 내려가 옛 친구 용필(지창욱) 등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주고,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경남의 가상 지역 거산을 배경으로 백두(장동윤)가 모래판에서 씨름 선수로 꿈을 키우는 여정을 그린다. '소년시대'는 안 맞고 사는 게 소원인 충남 부여의 고등학생 병태(임시완)의 성장기를 다룬다. TV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최근 한 달 내 공개된 드라마(판타지 제외) 중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 다섯 편 중 세 편이 서울이 아닌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관련 드라마 제작도 잇따른다. 넷플릭스는 아이유와 박보검이 제주에서 촬영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올해 공개할 예정이다. 그야말로 '탈서울 드라마 전성시대'다.

드라마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경남 가상의 지역 거산을 배경으로 한 청년 백두(장동윤, 오른쪽)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ENA 제공

드라마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경남 가상의 지역 거산을 배경으로 한 청년 백두(장동윤, 오른쪽)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ENA 제공


도시 청춘물이 사라지는 이유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부산 동구, 충북 단양군 등 89개 인구 감소 지역의 2020년 기준 만 20~34세 인구 비중은 13.3%였다. 지역 경기침체로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는 이들이 늘어 지방에서 청년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탈서울 청년 드라마의 유행은 아이러니다. '전원일기' 같은 20세기 농촌 가족극도 아닌데 21세기 트렌디 드라마에서 청춘들이 수도권을 떠나 지방에서 사랑하고 성장한다.

이런 현상은 청년들이 서울에서 겪는 상실감과 무관하지 않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서울에선 청년들이 더 이상 제대로 사랑하고 성장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서 비롯된 반작용이 탈서울 드라마 유행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울의 화려한 호텔(드라마 '킹더랜드')이나 대기업('사내맞선'), 그리고 로펌('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을 떠나 농촌이나 해변의 마을에서 청년들이 사랑하고 성장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지고 있는 배경이다.

'웰컴투 삼달리'에서 잘나가는 사진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삼달은 서울에서 쌓은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자 제주로 향해 삶을 일으킨다. 드라마를 연출한 차영훈 감독은 "고향에 갈 때 몇 시간씩 고속버스 입석표를 기다리더라도 내려가면 마음이 편하고 위로를 받곤 했다"며 "'전폭적으로 나만을 응원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고향'으로 대표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들려줬다.

충남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소년시대'에서 농고에 재학 중인 병태(임시완, 가운데)가 밭에 씨를 뿌리고 있다. 쿠팡플레이 제공

충남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소년시대'에서 농고에 재학 중인 병태(임시완, 가운데)가 밭에 씨를 뿌리고 있다. 쿠팡플레이 제공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초불확실성 시대에 접어들며 극심해진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탈서울 드라마는 숨을 고를 수 있는 해방구 역할을 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열된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소위 '지방러'를 자처하는 청년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현실도 반영됐다"고 진단했다. 소설 '수상한 식모들' 등을 쓴 박생강 작가는 "'사회구조적 문제 탓에 (각박하고 매정한) 서울에선 순수한 청춘이 나올 수 없다'는 불신이 쌓이면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청춘 드라마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현상을 바라봤다.

탈서울 청춘 드라마는 전략적으로 복고풍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소년시대'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이고, '폭싹 속았수다'는 1950년대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탈서울 드라마는 지방의 토속적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게 장점인데 과거의 추억까지 버무리면 중장년 시청자를 끌어모으기 훨씬 수월해 기획이 잇따르는 추세"라고 말했다.


사투리만 부각하지 않아야

복병도 있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한 관계자는 "제주도 바람이 너무 세서 촬영하는 데 애를 먹었고 날씨도 변덕이 심해 예상보다 촬영 기간이 길어졌다"고 귀띔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주승은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서 시골 경찰 석희를 연기하기 위해 1년 동안 사투리를 연습했다. "처음엔 드라마의 공간이 경북이었는데 중간에 경남으로 바뀌면서 사투리 연습 기간이 길어진" 탓이다.

사투리만 부각해 지방에서의 삶을 납작하게 그리지 않도록 제작에 주의도 요구된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소년시대'는 농고와 공고 학생들이 기싸움을 하는 에피소드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지방 고등학교는 곧 농고나 공고'라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우려가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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