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못 마시는’ 30년 경력 번역가는 왜 스타벅스에서 작업할까

입력
2024.01.16 15: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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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스타벅스 일기’ 펴낸
일문학 전문 번역가 권남희

권남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한겨레출판 제공

권남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한겨레출판 제공

약 10만 곳에 달하는 한국의 카페 가운데서도 ‘스타벅스’의 의미는 남다르다. 제목에 스타벅스가 들어간 책만 추려도 수십 권에 달할 정도다. 무라카미 하루키, 오가와 요코, 마스다 미리 등의 작품을 번역한 ‘일본 문학 번역 1세대’ 권남희(57) 번역가 겸 작가도 최근 에세이 ‘스타벅스 일기’를 출간하면서 여기에 가세했다. 스타벅스를 작업실로 삼은 권 작가의 일상을 담은 책이다.

33년 차 전문 번역가로 2000년대 초 국내 일본 문학 붐을 이끈 권 작가가 번듯한 사무실이 아닌 스타벅스에서 번역을 한다는 건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권 작가 역시 이전에는 집을 놔두고 카페로 공부하러 간다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도 즐기지 않는다.

최근 한국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권 작가는 반려견의 죽음과 딸의 독립으로 50대 중반에 시작한 독거 생활로 ‘빈 둥지 증후군’이 찾아왔다고 밝혔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식욕도 없고, 사는 게 무의미해 보름 동안 현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 생활이 계속됐다”는 그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스타벅스를 찾았다. 스타벅스 일기의 시작이었다.

걱정스레 들어섰지만…집 다음 편한 곳으로

스타벅스 일기·권남희 지음·한겨레출판 발행·288쪽·1만7,000원

스타벅스 일기·권남희 지음·한겨레출판 발행·288쪽·1만7,000원

‘젊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일해도 되나’라는 두려움을 안고 들어선 스타벅스는 이제 권 작가에게 “집 다음으로 편한 곳”이 됐다. 스타벅스에 갈 때 챙기는 필수품은 책과 노트북, 그리고 집게다. 번역할 책의 펼친 페이지를 고정시키는 집게만 있으면 카페는 그의 작업실로 변한다. 권 작가는 “집에서는 한 줄 쓰고 우느라 못 쓰던 나무(반려견) 이야기가 쭉쭉 쓰였다. 눈물이 나도 집에서처럼 마음 놓고 울 수 없으니 애써 참게 된다”고 말했다.

스타벅스에 가면 혼자 있을 때처럼 풀어지지 않으면서도 주변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고, 또 외출까지 하게 되어 ‘일석삼조’라는 것이 권 작가의 설명이다. 스타벅스에 앉아 스타벅스가 나오는 일본 소설을 번역하는 날에는 남모를 반가움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늘 일하기 편한 장소일 수는 없다. “‘춘화’급 그림이 있는 만화책을 번역하다가 후다닥 덮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고 그는 귀띔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권 작가가 스타벅스를 계속 찾는 건 브랜드의 유명함이나 인테리어보다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 스타벅스 비공식 ‘베이비시터’를 자청한다”는 그는 어린이 손님에게 선물을 하거나 번역하던 그림책을 같이 보기도 한다. 또 딸과 싸운 옆자리 중년 여성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말을 걸기도 했다. 카페에 ‘물 한잔 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그였지만, 스타벅스로 출근 도장을 찍은 후 달라졌다.

스타벅스 일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번역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권 작가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한다고 전했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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