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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몸'이 다가 아닙니다...새해엔 같이 운동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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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한동안 일기장에 2023년이라 써놓고 '아차' 하며 그 위를 새로운 숫자로 채우는 일들이 반복된다는 의미다.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연연하지 않고 싶지만 또 그만큼 무거워지는 몸은 시간을 비껴갈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새해에는 그렇게 운동을 다짐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운동이라고는 사회운동(Movement)만으로 충분하다고 변명하던 날들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본격적인 운동(Exercise)을 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의욕을 앞세우다가 자잘한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 역시 운동이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인가 고민하며 침을 맞았다. 동네 한의사 선생님은 나의 사연을 들은 후, 본인도 요새 풋살에 빠져 온몸이 온통 부상투성이라며 말하곤 이내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풋살을 전도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주말이면 풋살팀, 달리기 크루에 나가 연락이 어려운 사람, 운동을 더 잘하고 싶어서 개인레슨까지 받는다는 사람, 심지어 한 지인은 운동을 하다가 다쳤다며 깁스를 하고 등장해 사람을 놀라게 하고는 깁스한 채로 다른 운동을 찾아 헤매는 열정으로 사람들을 또다시 놀라게 했다.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공 차러 가자며 남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갈 때도 등 떠밀려 나갔던지라, 부상투혼까지 감수하며 운동을 찾는 이 여성들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축구하는 여성들이 나오는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이 시발점이었다고 했다. 여성들이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며 운동장을 활보하는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는 배경을 듣고 나서야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성차별은 옛날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학교 운동장은 여전히 남자 청소년의 공간이다. ‘왜 운동장에 여자 청소년은 보이지 않을까?’ 질문하면 ‘여자애들은 운동 싫어하니까요’라는 손쉬운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운동을 싫어하게 됐을 리 없다. 우리는 앞서 ‘왜’를 물어야 한다. 대체 왜 이들이 운동과 거리 두게 됐을까?
교복은 그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의 실마리가 된다.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 여자 청소년은 치마, 남자 청소년은 바지 교복이다. 단지 디자인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치마 구조로 인해 속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여자 청소년의 행동을 제약하는 한 요소다. 상의는 또 어떤가. 그때그때 유행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다닐 때 여자 교복은 소매 길이는 짧고 통은 작아서 불편을 호소하는 애들투성이었다. 애써 교복을 줄이지 않아도 교복 판매업체에서는 슬림하고 굴곡진 핏을 더 예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홍보했기에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생활복으로 많이 바뀌는 추세고, 여자 청소년도 바지 교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몸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단적으로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연예인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아이돌만 보더라도 그렇다. 남성은 근육질에 활동적인 몸을 매력적인 요소로 꼽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근육이 있더라도 더 마른 모습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사회적 동물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이런 기대로부터 자유롭기 쉽지 않다. 최근 발표된 질병관리청의 자료를 보면 2021년 19~29세 여성의 15.1%가 저체중 상태였으며 저체중이거나 정상체중임에도 불구하고 체중 감량을 시도한 비율이 46%나 된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몸에 대한 서로 다른 기대는 세상 곳곳에 흔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 왔다. 이를테면 반에는 힘이 조금 세거나 활발한 성격에 ‘조폭 마누라’라는 영화 제목에서 비롯한 별명을 가진 여자애들이 꼭 한 명씩 있었다. 키가 조금 크거나 덩치가 큰 여자애들은 남자애들과 비교 대상이 되며 놀림거리가 됐고 그들의 어깨는 자주 움츠러들었다.
성인이 되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 차이는 주민등록증 두께만도 못했다. 대학생 시절, 학교는 넓고 산 중턱에 위치한 단과대도 많아서 지각을 면하려면 재빠른 발은 필수였다. 헐레벌떡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중에는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여성 학우들이 있었고 그 모습은 서커스처럼 신기하면서도 위태로웠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생계유지에 힘쓰는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강의를 하러 갈 때면 부랴부랴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늘 촉박하다. 준비물을 잘 챙겼는지, 강의안은 충분히 숙지했는지 신경 쓸 시간도 부족하건만, 때로 카메라 앞에 서거나 중요한 자리다 싶을 때면 소소하게나마 뭘 또 찍어 바르고 머리에도 잔재주를 부려야 했다. 나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주변 여성동료들에게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꽤 오랫동안 수많은 문화권의 여성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발의 변형을 감수하며 전족을 했고 목이 부러질 만큼 무거운 가발을 썼다. 이를 문제시하면, 그저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개인의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이라 이야기했으나, 아무리 봐도 같은 종의 주변 많은 남성들은 수컷 청둥오리나 공작에 비해 꾸밈에 서툴렀기에 이 불균형은 자연스럽고 개인적이기보단 사회문화적이라 할 법했다.
운동과 교복, 화장과 하이힐 등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이야기하는 바는 단순하다. 남성에게는 기능하는 몸, 여성에게는 보이는 몸이 적합하다는 무언의, 하지만 강력한 신호다. 우리 몸을 둘러싼 사회의 서로 다른 기대는 얼핏 보면 그저 개인의 선호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으로 포장돼 있다. 그리고 남성들 역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몸을 갖기 위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기에 결국 다 비슷하게 힘든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남성에게 기대하는 기능하는 몸은 그 자체로 건강한 상태와 직결되거니와 사회의 권력과 자원을 획득하게 하는 데 여러모로 유리하다. 위기상황에서 더 손쉽게 벗어나게 하고 때로는 권력을 전복하거나 상대의 폭력에 대응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반면 여성에게 기대되는 보이는 몸은 어떤가? 그것을 더 잘 수행할수록 건강해지기는커녕 외부 상황에 취약해지기 쉽다. 이로 미뤄 보았을 때, 우리 사회 몸 규범은 남성에게 자원이 독점된 가부장적 권력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탈코르셋과 보디 포지티브 운동은 이러한 일련의 배경을 고발하고 그 흐름을 바꾸어내고자 저항하는 목소리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는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짧게 잘라 머리를 말리거나 가꾸는 데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화장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도 아낄 수 있게 했다. 축구와 주짓수를 배우며 몸이 더 건강하고 잘 기능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만들어 내는 몸을 둘러싼 변화에 남성도 함께할 수 있을까? 물론 탈코르셋 운동에 이상할 정도로 반감을 보이는 남성들도 있다. 몸을 향한 사회적 규범이 여성을 통제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권력구조임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운동으로 해방을 경험하는 여성들을 향한 일종의 시기, 질투다.
당장 여성과 같은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수많은 남성 역시 몸 규범에 시달린다. 당장 남자 중학교 청소년 대상 설문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로 꼽히는 것이 “남자 키가 그게 뭐냐”는 말이다. SNS만 보더라도 랜덤하게 돌아가는 피드 사이사이 근육질 남성이 침을 튀기며 운동을 종용하는 게시글이 올라온다. 그 아래는 성질내는 근육질 남성들을 ‘알파 메일(Alpha Male)’, 상남자라 칭송하며 선망하는 이들투성이다. 단지 부러움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약물의 힘을 빌려서까지 몸을 키우는 남성들까지 있다.
남성들에게 더 많은 변화의 롤모델이 필요하다. 강의를 하면서 정말 많은 남성들이 머리 한번 길러본 적 없다고 말한다. 아니, 나부터 그랬다. 염색은커녕 머리를 기르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이 꼬박꼬박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러다 최근에서야 처음으로 머리를 기르며 규범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머리를 말리는 건 귀찮지만 새로운 시도는 제법 흥미롭다. 운동도 친구 따라 축구, 당구, 테니스 같은 활동을 하면서 흥미를 붙이지 못해, 스스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나는 경쟁을 싫어하는 거였다. 지금은 달리기와 클라이밍에 재미를 붙이고 있고, 여행지에서 요가를 접해보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화이트 리본 캠페인의 공동설립자 마이클 코프먼은 책 '남성은 여성에 대한 전쟁을 멈출 수 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간은 타인이 벌이는 인간 해방 운동에 빚을 지고 있다. (...) 모든 남성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동성애자 해방운동과 오늘날 LGBTQ+ 운동에 감사해야 한다. 이 운동은 욕구와 사랑의 대상을 개인이 정의할 수 있다는 점을 새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든 우리를 지배하고 가두는 젠더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몸 규범을 해체하고자 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시도는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니 질투를 벗어던지고 변화에 첨벙 뛰어들자. 남성의 삶은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다채로워질 수 있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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