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문·스프링클러 없는 아파트... 아이 살리려 4층서 뛴 아빠는 그만...

입력
2023.12.25 19: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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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새벽 방학동 아파트의 비극]
3층서 난 화재로 2명 사망, 30명 부상
아래층 연기 순식간에 고층까지 퍼져
2001년 지어져 화재 대응 사각지대에

성탄절인 25일 오전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2명이 사망하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도봉소방서 제공

성탄절인 25일 오전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2명이 사망하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도봉소방서 제공

성탄절 새벽 서울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민 2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다쳤다. 발화지점인 3층에서 발생한 연기가 계단을 타고 순식간에 고층으로 퍼지며, 피해가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아파트는 소방법 개정 전 완공돼 방화문이나 스프링클러를 갖추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두 아이를 키우던 30대 남성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4층에서 뛰어내리다 사망했다.

25일 경찰과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57분쯤 도봉구 방학동의 23층 아파트 3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도봉소방서는 신고 접수 2분 만에 출동, 222명의 인력과 67대의 장비를 투입해 오전 8시 40분쯤 불길을 완전히 잡았다.

소방관들이 불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화마는 아파트를 집어삼켰다. 3층에서 발생한 불이 커져 12층까지 아파트 외관이 그을릴 정도로 불이 높이 올라갔다. 이 과정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다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3층 바로 위인 4층에 사는 A(32)씨는 현관문으로 연기가 들어오고 불길이 베란다로 번지자 생후 7개월 아기를 안고 뛰어내렸지만 결국 사망했다. 다행히 아버지 품에 안긴 아기, 재활용 쓰레기 포대에 먼저 떨어진 2세 자녀와 아내는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돼 현재는 안정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틈 막고 베란다에서 몇 시간 기다려"

25일 오전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2명이 숨지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소방당국이 불을 완전히 진압한 뒤 모습. 전유진 기자

25일 오전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2명이 숨지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소방당국이 불을 완전히 진압한 뒤 모습. 전유진 기자

피해를 키운 건 연기였다. 불이 난 직후 연기가 계단을 통해 급속도로 고층까지 퍼져 피해가 확대됐다. 11층에서 사망한 남성 B(38)씨의 경우 대피 과정에서 계단 내 연기를 흡입해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주민들도 짙은 연기로 인해 탈출이 어려웠다고 입 모아 말했다. 계단과 복도를 가득 채운 연기에 대피하지 못하고 베란다에서 구조되기를 기다린 이들이 다수였다. 아파트 14층에 사는 이모(70)씨는 "불이 났다는 비명소리를 듣고 깨서 문을 여는 순간 새카만 연기가 들이닥쳤다”며 “문틈을 천 뭉치로 막고 베란다에 대피해 있었다"고 말했다. 7층에 산다는 유모(19)씨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며 "오전 11시쯤까지 계속 베란다에서 기다리다 겨우 내려왔다"고 말했다.

방화문 없고 스프링클러는 16층 이상에만

25일 오전 4시 57분쯤 서울 도봉구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사진은 이날 오후 화재가 발생한 아파트에서 입주민이 임시 대피소로 들어가는 모습. 뉴스1

25일 오전 4시 57분쯤 서울 도봉구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사진은 이날 오후 화재가 발생한 아파트에서 입주민이 임시 대피소로 들어가는 모습. 뉴스1

해당 아파트에는 방화문이 설치돼 있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연기가 각 세대로 퍼져 피해를 키운 것으로 추정된다. 16층 이하 가구엔 스프링클러도 달려 있지 않았다. 이 아파트는 2001년 완공됐는데, 당시 소방법은 16층 이상 아파트를 대상으로 16층부터만 의무적으로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방화문 설치규정도 없었다. 2004년 5월에서야 11층 이상 공동주택 모든 층에 스프링클러와 방화문을 설치하도록 규정이 강화됐다.

새벽 시간 발생한 화재였다는 점도 피해를 키웠다. 실제로 화재가 발생한 3층에 거주하던 70대 남녀는 불을 보자마자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생명을 건졌다. 이들은 허리 통증과 연기 흡입에 따른 고통을 호소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현관문 밖에 화재경보기가 설치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15층에 사는 이모(54)씨는 "경보기 소리를 듣지 못했다"며 "불이 조금만 더 크게 났으면 다 죽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같은 단지에 거주하는 박모(15)군은 "오전 5시쯤 화재경보기가 울리긴 했으나 소리가 너무 작아서 복도에서만 들렸다"며 "한 달에 네 번 정도는 오작동이 있어 주민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화재 사각지대에 몰린 노후 아파트

화재가 발생한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의 내부 모습. 도봉소방서 제공

화재가 발생한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의 내부 모습. 도봉소방서 제공

전문가들은 화재 사각지대에 몰린 노후 아파트의 구조적 한계와 안전 의식의 부재를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설치된 방화문은 스토퍼 등으로 막아놓지 말고 항상 닫아놓아야 하며, 집마다 단독경보용 감지기를 설치해 조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면서 "가능하면 가정용 방독면도 비치하는 등 불편을 감수하고 안전을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화재가 발생한 층보다 그 위층이 인지도 늦고 확산도 빨라 가장 위험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26일 합동 현장감식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까지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계단식 아파트 특성상 연기가 쉽게 퍼져 피해가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합동 감식 후 피해 상황 및 원인을 정확히 밝힐 것"이라고 전했다.

전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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