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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암물질 먹고 만취한 게 자랑?" 정부 지침 비웃는 유튜브 '술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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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자리에 가도 술을 한 모금만 마신다는 가수 선미. 지난 10월 ‘만취 토크쇼’를 표방하는 개그맨 신동엽의 유튜브 방송 ‘짠한 형’에 출연한 선미는 진행자들의 권유에 소주를 ‘원샷’ 하고 생전 처음 막걸리를 마셨다. 계속된 음주에 목과 귀가 시뻘게진 선미는 녹화 도중 졸았고, 안무를 보여 주려다 주저앉았다. 같은 방송에 나온 배우 하지원은 술에 취해 했던 말을 반복했고, 일어나 춤을 추려는 그를 매니저들이 뜯어말렸다. 진행자들은 이들의 폭음과 술주정이 재밌다며 계속 술잔을 비웠다.
유명 연예인들이 술을 마시며 진행하는 유튜브 ‘술 방송’(술방) 열풍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 지난해부터 가수 이영지의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차쥐뿔), 가수 성시경의 ‘먹을 텐데’,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의 ‘술터뷰’, 그룹 어반자카파 보컬 조현아의 ‘목요일 밤’, ‘짠한 형’ 등이 줄지어 제작됐다. 가장 해로운 음주 습관인 원샷, 술 섞어 마시기, 술잔 돌리기 등이 어느 음주 방송이든 빠지지 않고, “목마를 때는 맥주만 한 게 없다” “역시 술을 마시니 솔직해진다” 등 연예인들의 술 예찬도 여과 없이 방송된다.
정부의 규제는 사실상 없다. 유튜브는 원천적으로 정부의 규제 대상이 아니다. 정부가 지난달 유튜브 술 방송을 겨냥해 "미성년자의 콘텐츠 접근을 최소화하라" "음주를 미화하는 장면에서는 경고 문구 등으로 유해성을 알려라"라는 지침 2개를 내놓았지만 강제성이 없는 권고여서 '규제 시늉'에 그친다.
정부 지침 발표 이후에도 연예인 음주 방송은 승승장구 중이다. 인기 술방 채널의 구독자는 수십만~수백만 명에 달한다. 만취할 때까지 마시는 게 콘셉트인 ‘짠한 형’은 개설 3개월 만에 구독자 100만 명을 돌파했고, 올해 국내 유튜브 ‘최고 인기크리에이터’ 7위에 오를 만큼 인기몰이 중이다. 아이돌을 출연시켜 '누가 더 술을 잘 마시나' 대결을 붙이는 '차쥐뿔'의 구독자는 338만 명이다. 올해 유튜브 최고 인기 영상도 음주 방송인 ‘차쥐뿔-카리나 편’(10월 기준 조회 수 1,664만 회)이었다. 이달 중순 전 연인 신동엽과의 20년 만의 재회를 첫 방송으로 공개해 화제를 모은 ‘이소라의 슈퍼마켙’ 역시 술 방송이다. 음주 방송을 '재기의 기회' 혹은 '새로운 시장'으로 본 유명인들이 더 많이 뛰어들 가능성도 적지 않다.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사는 음주 장면 규제를 받는다. 청소년보호시간대에 음주 장면, 음주 미화 행위 방송을 내보내면 안 된다(‘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8조 건전성 조항, 제44조 어린이·청소년 시청자 보호 조항). 미디어의 음주 장면이 실제 음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2021년 국민 1,000명에게 "미디어에 묘사된 음주 장면 시청 후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20%가 “그렇다”고 답했다.
구글이 운영하는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는 사실상 제재의 사각지대여서 폭음과 음주 미화 행위가 날것 그대로 방송된다. 전문가들은 술 방송이 실제로 음주 행태를 악화시킨다고 진단한다. 최근 음주 관련 각종 통계의 가장 큰 특징은 2030세대 여성과 청소년의 음주 및 폭음 증가. 이해국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는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음주 콘텐츠 유행과 연예인 이름을 딴 술 출시 등이 여성·청소년 음주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알코올 중독 환자와 알코올에 의한 사망자 수도 증가 추세다. 이 교수는 “음주는 조건 반사적 행위”라며 “술 마시는 사람이나 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적 있던 사람의 재발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강화할 우려도 크다. 손애리 삼육대 보건관리학과 교수는 “음주 방송은 ‘술을 마시면 관계가 좋아진다’ 등 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제공한다”며 “술이 마약인 대마초보다 중독성과 내성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음주 방송이 경각심을 무너뜨리고 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까지 형성시킨다”고 지적했다. 2023년 국림암센터 ‘대국민 음주 및 흡연 관련 인식도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66.4%)은 술이 석면, 카드뮴과 같은 1군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음주 방송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 기관인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지난달 유튜브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도 적용되는 ‘절주 문화 확산을 위한 미디어 음주 장면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발표했다. 기존 10개 항목에 '미성년자의 콘텐츠 접근 최소화' '음주를 미화하는 장면의 유해성 고지' 등 2개 항목이 추가됐으나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달 이후 일부 음주 방송은 "알코올은 발암물질"이라는 경고 문구를 자막에 넣었으나 40분 안팎의 전체 방송 시간 중 2초 정도 노출시킨 게 전부였다.
가이드라인 자체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도 있다. '음주의 긍정적 묘사 피하기' '연예인 등 유명인의 음주 장면 신중하게 묘사하기' '폭음·만취 등 해로운 음주 행동 묘사 삼가기' 등의 권고 지침이 기존 10개 항목에 포함돼 있었음에도 술 방송의 범람을 막지 못했다.
한국의 미디어 음주 장면 노출 규제는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느슨하다. 프랑스, 스웨덴 등에서는 TV, 라디오의 술 광고를 전면 금지했고, 미디어의 음주 장면 노출을 막는 국가도 적지 않다. 이해국 교수는 “술 광고에서조차 모델이 술을 직접 마시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들이 많다”며 “그에 반해 한국 정부는 음주 예방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연예인 등 유명인들의 '각성'도 필요하다. 손애리 교수는 "만취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강한 외국에선 연예인이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 먹는 일"이라며 "본인의 음주 장면이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하고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헌식 평론가는 "스스로 트렌드를 이끌어가지 못해 음주로 도피한 콘텐츠는 설 땅이 없다고 본다"며 "무조건 많이 먹기만 하는 먹방이 더 이상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목적인 방송은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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