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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이것' 부담… 일본에 유독 사실혼 많은 이유 있었네

입력
2023.12.23 04:30
수정
2023.12.24 16:01
12면

[같은 일본, 다른 일본]<103>일본 여성의 오랜 소망, ‘부부별성’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한국과 달리 결혼한 여성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일본에서는 아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한국과 달리 결혼한 여성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일본에서는 아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본 여성들의 오랜 소망, ‘부부 별성’ 제도

많은 일본인 여성이 입을 모아 소망하는 것이 ‘부부 별성’ 제도다. 일본에는 호적상 한 가족의 성씨를 하나로 통일하는 제도가 있다. 서양권에서도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그것이 법적 의무화돼 있다는 것이 문제다. 혼인신고를 하면 반드시 한쪽의 성씨가 바뀐다. 남편의 성씨로 통일하라는 규정은 없지만, 아내가 남편의 성씨를 좇는 것이 관습상 일반적이다. 실제로 아내가 남편의 성씨로 개명하는 경우가 95%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 여성이 결혼과 함께 개명이라는 짐을 떠안는다.

복잡다단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개명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다. 취미로 글을 올리던 인터넷 게시판의 닉네임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하물며 어린 시절부터 써 온 본명을 바꾸는 것이니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권, 면허증 등 신분증은 물론이요, 은행, 보험, 연금, 신용카드, 휴대폰 계약, 항공사 마일리지 등의 개인 계약도 따로 갱신 절차를 밟아야 한다. 개명 전의 이름으로 돼 있는 자격증, 특허, 논문 등의 개인 성과물도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별도로 증명할 필요가 생긴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공적인 관계에서 성씨를 호칭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 아무개씨’, ‘이 아무개님’이라고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는 한국과는 달리, ‘다나카씨’, ‘아베씨’ 등 성을 호칭으로 대신한다.

결혼 개명은 커리어에도 상당히 지장을 준다. 직장 동료나 비즈니스 관계의 지인들 사이에서 익 숙한 호칭이 바뀌면서 업무에 혼선이 생기는 일도 다반사. 개명 당사자는 스스로 노력해서 쌓아온 사회적 정체성이 흔들리는 혼란을 피할 수 없다.

◇부부 동성 제도는 ‘사실혼’이 늘고 여성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

이혼이라도 하면 이야기가 더욱 복잡하다. 둘 사이의 혼인 관계 해소만으로 끝나지 않고, 한쪽만(대부분의 경우 여성)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가는 번잡한 절차를 떠안고, 그 과정에서 이혼 사실은 만천하에 알려진다. 결혼과 이혼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결정인데,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사생활을 노출시키는 결과다.

이런 현실적인 불편함과 부당함을 구구절절 나열할 것도 없이, 이 제도가 남녀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반하는 것도 분명하다. 여성은 미혼일 때는 아버지의 족보에, 결혼 후에는 남편의 족보에 종속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과는 상반된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 전근대적인 제도의 모순에 공감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삶을 영위하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는 커플이 상당히 많다. 각각의 사연은 다양하지만, 의외로 많은 커플이 부부 별성 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혼인신고를 미루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이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사회생활을 활발하게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혹은 결혼 때문에 개명은 했지만 직장에서는 결혼 전의 이름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두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워낙 그런 사례가 많으니 관공서나 직장의 행정 서류에 ‘개명하기 전의 성씨(旧姓)’를 쓸 칸을 아예 마련해 놓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여성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을 강요하는 이 법을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 이 제도가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요인 중 하나라는 우려도 커졌다. 일본 법제처는 1990년대에 이미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라는 개선안을 제시했다. 가족의 성씨를 통일할지 말지를 당사자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전처럼 가족의 성씨를 통일해도 괜찮고, 개명이 부담스러우면 별성을 써도 좋다는 것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 제도가 30년 가까이 입법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반대파의 명분은 “가족이 동일한 성씨를 써야 가족이라는 일체감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자녀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이다. 아빠와 엄마의 성씨가 다르면 한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사라진다는 논리에 납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부부가 서로 다른 성씨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의 가족들은 오래전에 붕괴 위기에 빠졌어야 하지 않은가?

◇가족의 본질은 정서적 유대감

마침 가까운 일본인 지인 중에 가족의 성씨 통일 문제로 파란만장한 부침을 경험한 사례가 있다. 10년 이상 남편과 아내 모두 친하게 교류해 온 지인 부부다. 둘 다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전문성을 활용한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주변으로부터 신망이 두텁다. 서로를 응원하는 잉꼬부부로, 커플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둘은 불혹이 가까운 늦은 나이에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한쪽에만 개명의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신고는 부부 별성 제도가 시행된 뒤로 미루었다. 사실혼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늦둥이가 생기면서 고민이 커졌다. 사실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사생아(非嫡出子)’로 인지된다. 엄마와 아빠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배 속의 아기에게는 의사를 물어볼 방법이 없다. 둘은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혼인신고를 했다. 가족의 성씨를 남편의 것으로 통일하고 새 가족을 맞이했다. 아이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확정한 뒤 둘은 이혼했다. 실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사이좋은 가족이지만, 아내의 활발한 사회 활동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상의해서 결정했다.

일본에서 이들처럼 현실적인 이유에서 혼인 관계를 맺거나 혹은 해소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이 지인 커플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계기였다. 대규모 자연재해는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른다. 불의에 어려움에 처하거나 가족과 영영 못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큰 지진을 경험하고 나니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이 걸렸다. 예를 들어, 병원 중환자실의 면회는 법적인 가족에게만 허용된다. 생명보험이나 상속과 관련해서도 불필요하게 일이 꼬일 수 있다. 둘은 신중하게 상의를 거듭한 끝에 다시 한번 혼인신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둘 다 환갑을 넘긴 만큼, 이번에는 개명에 대한 거부감도 크지 않았다고 한다.

혹자는 남편이든 아내든 어느 한쪽이 불편을 감수하면 그만이지 결혼과 이혼, 다시 결혼을 되풀이할 정도로 난리를 칠 일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결혼이 한쪽에만 부담을 주는 불공평한 선택이 되지 않도록 상의하고 함께 노력했다. 만약 어느 한쪽이 사회적인 불리함을 떠안았다면, 외려 한 가족이라는 정서적 유대감을 키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법적으로는 각각의 성씨로 산 기간이 길었지만(지금도 사회생활에서 각자의 성씨를 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렇게 보면 악법의 존재가 이 가족을 단단히 묶는 힘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언제쯤이나 일본에서 부부 별성 제도가 실현될까. 일본 사회가 현저히 보수화하면서, 오래된 악습을 적극적으로 뿌리치는 개혁의 힘은 더 옅어지는 듯하다. 어쩌면 앞으로도 한참 이 악법이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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