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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지워진 '임산부', 대한민국에서도 사라져가는 '임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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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터부(taboo·금기)'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꺼려져서, 혹은 위험해서 어떤 행위나 대상을 피하는 일'을 뜻한다. 18세기 영국인이 기록한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뜻은 ‘생리혈’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여성의 월경은 터부였다. 구약성서 레위기에는 월경 중인 여성이 만진 물건을 건드린 남성은 얼른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중세시대에는 피를 자주 흘리는 여성이 더 죄가 많은 존재로 규정됐다. 네팔에서는 월경하는 여성을 외양간에 감금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2005년에서야 법으로 금지됐다.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 터부가 된 이유는 여성의 월경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피임법이 없었던 과거에 가임기 여성들은 임신, 출산, 수유를 반복하느라 월경을 중단하는 기간이 길었다. 영양상태도 좋지 못해서 생리주기도 불규칙했다. 인류의 첫 조각품으로 알려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2만5,000년 전 추정)의 모습처럼 수만~수천 년 동안 여성들은 임산부로 살았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일상이었다. 과거 화가들이 모델로 세워 그려낸 여성의 상당수도 임산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에 임산부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왜일까.
서양미술사 책 한 권을 펼쳐 여성을 그린 그림을 찾아보자. 매우 많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대부분이다. 화가 등이 그들에게 붙인 이름은 여신, 성모, 여왕, 부인 또는 이름 없는 나부(벌거벗은 여성)이다. 실존 인물을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은 대부분 왕비나 귀부인들이었다. 그중에 임산부가 있을까. 거의 찾을 수 없거나 의상에 배가 가려져 알 수가 없다. 얀 판 에이크(1390~1441)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년) 속 여인이 임산부처럼 보이지만 오해다. 당시 유행하던 임부복 스타일의 값비싼 드레스를 입었을 뿐이다. 20세기 초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의 ‘희망 I'(1903)에 이르러서야 만삭의 여성이 등장한다.
선사시대부터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임산부의 모습은 그림과 조각에서 비교적 흔했다. 8, 9세기의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으로 기독교가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으로 갈라지면서 임산부 표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중세시대 서유럽에서는 만삭의 성모마리아 또는 세례요한을 임신한 만삭의 엘리사벳이 많이 그려졌다. 16세기 종교개혁과 ‘취리히의 성상파괴운동'(1542년) 이후에는 성모마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임산부의 모습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유럽 르네상스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현실적인 모습이 아닌 이상적인 신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미화된 모습으로 그려졌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가 1963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임신한 여성의 사진은 아름답지 않다”고 응답했듯이 임산부의 모습은 오랫동안 미적 취향에서 배제됐다.
미술사에서 임산부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에 대해 영국 미술사학자 카렌 헨(Karen Hear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상화는 근본적으로 의도적일 수밖에 없다. 가임기 여성 대부분이 임신을 반복했던 시기에 임신한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선택에 의한 삭제’로 보인다.” 카렌은 미술관 창고에서 신원 미상의 임산부 초상화 2점을 보게 된 이후부터 20년 동안 임산부 초상화를 연구했다. 영국 상류층 부인들의 임신 여부를 문헌 기록을 통해 추적한 바에 따르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 사이에 영국에서 임산부 초상화가 짧게 유행했다. 플랑드르(현재의 네덜란드 지역) 출신의 화가인 마커스 지어래츠 2세(1561~1636)와 앤소니 반 다이크(1599~1641)가 남긴 임산부 초상화들은 오늘날의 ‘만삭 사진’처럼 보일 정도다.
이 시기 영국에서 임산부 초상화가 많이 그려진 이유로 카렌은 두 가지를 꼽았다. 우선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즉위(1558년)다. 여왕의 임신이 국가적 관심사가 되면서 여성의 출산은 신의 축복이자 신앙심의 결과로 여겨졌다. 정치적 이유로도 여왕의 후사는 중요했다. 다음 이유는 높은 영아 사망률과 산모 사망률이다. 중세시대의 영아 사망률은 60%에 달했으며, 17세기 영국에선 한 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아기가 4명 중 1명이었다. 산모 사망률도 매우 높았다. 16~18세기 영국 여성 1,000명 중 약 30명이 출산 도중 또는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영국 의료협회저널, 1982년). 카렌이 조사한 초상화 속 여성 대부분이 출산 직후 사망했다. 출산을 앞둔 아내가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남편들이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 영국에 주목할 만한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1622년 출산으로 인한 죽음을 예감한 27세의 엘리자베스 조셀린은 태어날 아이에게는 "경건하고 선하게 살라"고 권하는 편지를, 남편에게는 아이 양육에 필요한 조언을 담은 편지를 아무도 모르게 써두었다. 그는 딸을 출산한 지 9일 만에 산욕열(출산 후 세균감염)로 숨졌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남편이 뒤늦게 조셀린의 편지를 발견했고 2년 후 '어머니의 유언'(1624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책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출산으로 사망한 여성들을 향한 추모 열풍이 한동안 이어졌다.
1659년에 그려진 캐서린 도머의 초상화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치마 천을 들어올리며 배를 감싸고 있는 포즈는 당시 임산부 초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형태였다. 캐서린은 1659년 5월 7일 출산한 후 산욕열을 앓다가 사망했고 6월 9일에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그림 속 캐서린은 오른손으로 옆에 놓인 작은 화병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을 담는 병(tear bottle)’이다. 캐서린이 사망한 1659년에 완성된 이 초상화가 그녀의 사후에 그려졌거나 사망 후에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힘든 가사노동을 피할 수 있었던 상류층 엘리트 여성일지라도 출산으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신분이 낮은 여성들의 임신·출산으로 인한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세균의 존재를 몰랐던 19세기 중반 독일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1818~1865)가 세균의 위험성을 알리며 출산 전에 손 씻기를 강조한 것만으로 산욕열에 의한 산모의 사망이 급격히 줄었다. 제멜바이스가 1861년에 발표한 책에는 당시 지역에 따라 많게는 30%의 산모가 산욕열로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수많은 산모의 목숨을 구한 제멜바이스의 “손을 씻으라”는 주장은 당시엔 ‘미친 소리’로 취급받았고 안타깝게도 그는 정신병동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의료시스템이 부족한 아프리카 지역의 일부 국가의 산모사망률은 지금도 7명당 1명으로 여전히 높지만, 21세기엔 세계 대부분 지역의 산모사망률이 10만 명당 10명 미만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앞서 소개한 미술사학자 카렌 헨은 2020년 영국 런던 파운들링 박물관의 '임신의 초상전'을 기획했다. 16세기 영국의 임산부 초상화에서부터 미국 가수 비욘세의 만삭 사진까지 500년간 포착된 임산부의 모습들이 전시됐다. 비욘세의 만삭 사진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30년 전 할리우드 스타 데미 무어가 파격적인 누드 만삭 사진을 최초로 공개할 때에도 세계적 이슈가 됐다. 이후 많은 유명 인사들이 만삭 사진을 공개하면서 만삭 사진은 대중화되고 논란도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논란들이 존재한다. 그저 신성해 보이는 임산부의 모습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고, 평생 한번 경험하는 출산의 기쁨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팝가수 리아나의 파격적인 만삭 패션도 큰 화제였다. 리아나는 “10개월의 임신 기간을 최대한 즐기고 싶다. 임산부들이 강요받는 전통적 모습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전 세계 모든 여성의 상황이 동일하진 않지만, 오늘날 많은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과거처럼 위험하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한 선택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또 하나의 위험하고 두려운 고민이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임산부를 찾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예쁘지 않아서'였다. 임산부가 여성의 실제 모습이었음에도 그림으로 남겨지지 않았거나 지워졌다. 성모마리아처럼 그려졌거나 사망한 산모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담은 초상화만 일부 남았다. 과거 그림의 주요 고객층인 남성의 눈높이에 맞춘 결과였다. 20세기 이후 예술계는 여성의 실제 모습과 새로운 자아상 탐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누군가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곧 그 누군가가 겪고 있는 세계 전부를 함께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크게 줄었지만 임산부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위상과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대중화된 만삭 사진이 그 증거다.
전혀 다른 이유로 한국 길거리에서도 임산부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2일 "한국은 소멸하나"라는 제목의 미국 뉴욕타임스(NYT) 칼럼은 한국의 저출생 문제가 14세기 유럽 인구 4분의 1을 휩쓸고 간 흑사병보다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0.7명(올해 2, 3분기)이라는 우리의 합계출산율은 중세시대의 높은 영아·산모 사망률과 흑사병이 안겨준 고통보다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최근 미술사학자들과 현대예술계는 '미술사에서 사라진 임산부'를 연구하며 반성했다. 한국의 저출생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현실은 무엇인지, 임산부의 실제 모습은 어떤지를 탐색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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