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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당당히 게임을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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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지독한 인연이 시작되겠구나 느낀 건, 아무래도 ‘스타크래프트’를 만나면서였다. 그 이전에도 문방구 앞 오락기를 통해서, 또 친구 집에서 간간이 게임을 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게임은 그저 친구와 함께 놀기 위한 많은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는 달랐다. 게임을 중계하는 TV 프로그램이 생기고 게임과 관련한 각종 파생 상품이 나왔다. 친구들은 크고 작게 승부를 겨루며 실력을 뽐냈고 누구나 저마다 가슴속에 응원하는 프로게이머 한 명쯤은 있었다. 그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주변 어른들은 간혹 한심해하면서도 어른이 되면 어련히 그만두겠거니 했지만, 한참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도 게임은 나의 가장 열정적이고 오랜 취미다. PC게임부터 콘솔게임까지 두루 섭렵하고 잘 만든 게임은 예술과 구분할 수 없다고 믿는 과몰입 끝판왕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변에서 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게임이라는 대답은 항상 후순위로 밀렸다. 운동, 독서, 영화, 쇼핑 같은 것들을 줄줄이 말한 후, 충분히 관계가 쌓였다 싶으면 그제야 수줍게 사실 게임도 좋아한다고 밝혔다. 많은 게이머가 이런 반응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 게임은 여전히 청소년 때나 하는 유치한 취미활동으로 여겨진다. 대개는 그러려니 하지만 또 권장할 만한 취미로 여기지는 않고 나아가 폭력성을 유발하거나 중독자를 양산하는 음침하고 부정적인 활동으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아니, 달라진 지 오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행한 2022년 하반기 및 연간 콘텐츠산업 동향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콘텐츠 산업 내 매출에서 게임은 약 21조1,848억 원이다. 비중으로 따지면 14.3%로 방송(17.4%), 출판(16.7%), 광고(15.2%)에 이어 4위에 올랐다. 콘텐츠 수출액으로 따지면 더 놀랍다. 게임산업 수출액은 약 11조4,761억 원으로 전체 콘텐츠 수출액 중 67.4%를 차지했다. 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한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한국 게임산업의 세계 게임시장 점유율은 7.6%로 미국(22.0%), 중국(20.4%), 일본(10.3%)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게임은 더 이상 일부의 마니악한 취미생활이 아니며 명실상부 글로벌하고 대중적인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급격한 성장 때문일까? 여전히 어떤 지점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는커녕 같은 게이머들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바로 페미니즘 마녀사냥 때문이다.
최근 넥슨코리아가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캐릭터 홍보 영상에서 집게손 모양이 나왔다며 2016년도에 사라진 ‘메갈’을 여전히 찾으며 여성 노동자를 공격하고 페미니즘을 음해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2년 전 ‘GS25 포스터’에서부터 이어진 이런 손가락 타령이 왜 남성 ’혐오’가 아니라 페미니즘을 향한 마녀사냥의 일환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이가 수차례 이야기했다. 더 이상 말을 얹는 게 소모적 논쟁에 불쏘시개를 넣는 게 아닐까 염려되지만 그럼에도 게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사실 처음 일부 게임 유저들로부터 이런 반응이 나왔을 때에는 ‘새삼스럽게 뭘 또’ 같은 느낌이었다. 각종 게임 커뮤니티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이미지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여성가족부나 페미니즘을 향한 조롱 섞인 게시물은 늘 있어왔다. 뭐 대단히 여성 혐오적인 콘텐츠에 동의하고 즐기는 유저가 아니라 할지라도 게임 내에서 사용되는 여성 캐릭터에, 여성 유저를 향한 말에 어느 정도 성차별적 요소가 섞여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수년째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LOL), 이른바 '롤'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에게 롤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를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금세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 이름이 쏟아진다. 가렌, 다리우스, 야스오, 루시안 등 멋지게 꾸며진 캐릭터의 옷과 몸을 살펴보게 한다. 이어서 여성 캐릭터들도 찾아보게 한다. 아리, 케이틀린, 애쉬, 미스포춘 등 또 각종 캐릭터가 나온다. 이들의 옷과 몸은 확연히 다르다. 게임에서처럼 전투에 나가게 된다면 어떤 옷을 입겠냐는 물음에 당연히 더 탄탄한 갑옷으로 무장한 남성 캐릭터들의 옷을 고른다. 사냥을 하고 레벨을 올리는 전투 RPG 게임도 마찬가지여서 ‘여성 캐릭터의 레벨은 노출도에 비례한다’는 말을 관용구처럼 쓸 정도였다. 그러니까 게임에서 여성을 향한 이런 성적대상화는 흔했다. 어쩔 수 없다거나 ‘남성 유저들이 좋아하니까’와 같은 말들로 허용됐다.
그러다 보니 게임을 하는 유저들 사이에서도 이런 여성 혐오적인 메시지는 통용됐다. 이를테면 ‘혜지’라는 표현이 그랬다. 여성형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혜지’라는 이름은 여성이 게임을 잘하지 못한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혐오 표현이지만 마치 ‘김 여사’처럼 흔하게 쓰였다. 그저 큰 죄책감 없이 보이스채팅에서 여성 유저가 들어오거나 아니면 성별과 상관없이 그냥 게임을 잘하지 못하면 “너 혜지냐?”라는 식으로 여성을 뭉뚱그려 비난하고 조롱했다. 그리고 이게 내가 게임을 하면서 본 혐오 중 지면을 이용해 소개할 수 있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모습이다. 그 외에도 여성 캐릭터를 성기에 빗대 표현한다던가 더 입에 담기도 싫은 혐오를 수두룩하게 봐왔다.
기존에 자행되는 혐오에는 아무런 성찰 없이,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낸 성평등으로의 변화에 눈감으며 억지 논란을 통해 운동의 의미를 훼손하고, 여성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괴롭히고 노동권을 박탈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일전에 발생한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논란도 마찬가지다. 여성 캐릭터를 충분히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개발사의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냈고 그중에서도 애초 지목된 그림을 남성이 그린 것으로 드러나자 다른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 괴롭혔다.
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모든 남성이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같은 사고를 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런 사고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성연대에서 반복되어 왔다. 수많은 대학과 회사, 학교의 단톡방 성희롱 사건에서, 수십만이 가담한 이른바 ‘n번방 사건’에서, 또 지금 게임을 둘러싼 페미니즘 사상 검열에서 반복되고 있는 건 ‘남성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원하며 페미니즘은 남성의 이해와 반목한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이다. 애초 그 내용에 동의할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수많은 사람이 ‘남성’이라는 기호로 묶여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견고한 남성연대는 자행되는 폭력에 문제 제기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을 ‘남자답지 않은 남자’라고 낙인찍으며 배신자 취급으로 통제해 왔다. 이런 통제와 일반화야말로 남성에 대한 멸시 그 자체다.
그간 수많은 게이머가 그토록 악몽같이 여겼던 낙인과 편견을 돌이켜보자. 게이머라면 이제 전설이 된 한 뉴스에서의 ‘PC방 폭력성 실험’(PC방 전원장치를 내리며 반응을 살피고 그때 보여주는 폭력성이 게임과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 뉴스 보도)과 게임을 둘러싼 편견, 그에서 비롯된 ‘셧다운제’(청소년 게임 중독을 예방하겠다며 청소년의 심야 게임을 강제적으로 금지한 제도로 2022년 폐지됐다)의 폐해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과 여성을 향해 말도 안 되는 음모를 펼치며 폭력을 휘두르는 지금 모습이 그때 게이머들을 향한 것과 얼마나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때의 수난을 기억한다면 게임을 음지로 내모는 이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야만 한다.
기업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롤’을 만든 ‘라이엇 게임즈’는 2019년부터 ‘다양성과 포용 활동 연차보고서’를 발간해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국내 유명 게임사 스마일게이트도 D&I(Diversity&Inclusion)실을 통해 다양성과 포용성을 고려한 게임을 만들고자 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함께 게임을 사랑했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본 게이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자신이 즐기는 게임이 음지에 남길 원하지 않는다. 서비스가 지속되고 더 재미있는 콘텐츠가 계속 생산되려면 더 많은 사람이 게임에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분명 더 많은 게이머가 페미니즘 백래시, 여성을 향한 성적인 대상화와 차별, 폭력을 지금 이대로 지속하겠다는 이 투명한 혐오를 거부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게임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더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신이 애정하는 게임을 소개할 수 있도록 이제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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