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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 인간만 사는 행성에는 성차별도 성범죄도 출산 압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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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자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글을 씁니다.
세계문학사를 공부해 보면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해럴드 블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좌파 이론가들을 모두 ‘분노 학파’라고 싸잡아 매도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 ‘분노 학파’에는 주로 페미니스트, 마르크시스트, 해체주의자들이 포함된다. 그런 평론가가 페미니스트 작품으로도 한 획을 그은 과학소설 ‘어둠의 왼손’(1969)을 서구의 정전 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면서 작가인 어슐러 K. 르 귄을 ‘반지의 제왕’의 톨킨보다 더 뛰어날 뿐 아니라 판타지 문학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켰다고 격찬했다. 이 작품은 출간 이듬해에 과학소설에 수여하는 최고의 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휩쓸었으며 학계와 문학평론가들의 찬사도 함께 받았다. 대개 최초의 과학소설로 꼽히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만큼이나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 작품이 출간된 뒤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페미니즘적 사고 실험에 대한 평가였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줄이면 테라(Terra) 출신의 인간인 겐리 아이(Genly Ai)가 거의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고 17광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겨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행성에 특사로 파견되어 임무를 완수해 내는 이야기다. 참고로 테라는 지구를 가리키며 주인공은 흑인 남성이다. 르 귄의 작품에서는 유색 인종이 주인공이고 백인은 조연이거나 악당인 경우가 많다. 이런 장치도 주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지구에는 백인 숫자가 적은데(2023년 기준 16% 정도) 왜 미래 사회의 주인공을 주로 백인으로 설정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겨울 행성에는 양성을 가진 인류가 살고 있다. 그들은 한 달을 주기로 2~5일 정도만 남성 또는 여성이 된다. 당사자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동물의 발정기 같은 ‘케메르 기간’에는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남성이 되거나 여성이 된다.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하지 않으면 다시 양성인으로 돌아간다. 임신하면 수유 기간까지 여성으로 지내고 남성 성기는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가 수유 기간이 끝나면 다시 양성체가 된다. 케메르 기간에 누구나 남성 또는 여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어머니이면서 아버지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회적 구별인 젠더가 있을 수 없다. 차이가 없으니 차별도 없고 성범죄도 불가능하다. 모두가 출산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출산에 묶인다는 개념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이분법적인 사고 경향이 덜한 편이다. 고등동물이라면 어떤 개체든 ‘나와 너’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남성과 여성, 지배자와 피지배자, 능동과 수동 같은 개념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것은 아예 생길 여지가 없다. 프로이트의 가부장적인 정신분석 방식은 아예 그 기반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기록하면서 겨울 행성 사람들을 지칭할 때 3인칭 대명사가 문제가 되었다. 기록자는 그(he)라는 대명사를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여성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게 된다고 토로한다. 그녀(she)를 쓴다고 해도 헷갈리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성에서는 그 누구도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에 관심이 없고 하나의 인격체로만 존중되고 판단된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일부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은 이 점을 문제 삼았다. 양성인인데,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를 사용한 것이 완전한 실패라고 본 것이다. 그(he)는 그녀(she)와 그것(it)을 배제하면서 대표하는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양성인에 대한 사고 실험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 양성인들이 정치가일 때 남성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만큼 집 안에서의 모습은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하던 작가는 ‘어둠의 왼손’보다 1년 전에 발표한 단편소설인 ‘겨울의 왕’을 ‘바람의 열두 방향’(1975)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집에 수록하기 위해 개작하면서 인칭 대명사를 '그' 대신에 '그녀'로 바꿔버리는 복수(?)를 단행했다. 이 단편소설의 배경도 ‘어둠의 왼손’과 같은 곳인 양성인들이 살고 있는 겨울 행성이다. 젊은 왕을 '그녀'라고 지칭하는데, 읽어보면 느낌이 묘하다. 작가는 그 묘한 느낌을 즐겼던 모양이다. 영어의 경우 왕(king)은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이상한 느낌이 더 강하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그녀를 아예 '여인'이라고 해버렸다. 잘 새기며 읽지 않으면 이 대명사 때문에 상당히 헷갈린다.
작가는 1976년에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한 적이 있다. '그'를 대신하기에 좋은 대명사로 그들(they)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중세 영어에서는 이것이 성을 구분하지 않는 3인칭 단수 대명사로 쓰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 현대에 들어 페미니즘이 일반화되면서 구어에서 상당히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참고로 한국어의 경우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를 번역해 수입하는 과정에서 그와 그녀가 발명되어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어둠의 왼손'은 양성인의 세계에 간 지구인 여성의 관점에서 쓰인 기록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배경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당대에 활발하게 되살아난 페미니즘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여성 작가의 남성 언어라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신뢰와 배신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소설은 게센(그곳 언어로 겨울이라는 뜻이다) 행성의 큰 국가인 카르히데의 축제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인 아이는 그다음 날 카르히데 왕을 알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수상인 에스트라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카르히데 주민들이나 왕은 카르히데와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외계에서 아이를 특사로 보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외계나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의 존재도 믿기 어려워했다. 바로 그날 에스트라벤이 더 이상 아이에게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을 알렸고 다음 날 반역자로 낙인찍혀 추방된다.
아이는 다음 날 왕을 알현하지만 우호적인 관계 수립은 거절당한다. 아이는 게센 행성의 또 다른 큰 국가인 오르고레인으로 간다. 이 행성의 어느 국가든 한 군데만 아이를 보낸 외계인 에큐멘 연합과 관계가 수립되고 나면 다른 국가들도 자연스럽게 좋은 관계가 맺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고레인은 언론을 통제하고 전체주의적인 정치세력이 권력을 확보하는 과정에 있었고 그들은 아이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아이는 그 희생양이 됐다. 그는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에스트라벤에게 구출돼 함께 탈출의 긴 여정에 나선다. 그 여행에서 지구인 남성과 게센의 양성인이 서로의 차이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깊이 신뢰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으로 말하기’에도 성공한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아이는 임무를 완수하지만 그 과정에서 에스트라벤은 사살당한다.
이런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당시 과학 소설의 주류였던 아서 C.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과 아주 달랐다. 두 작가는 어려운 물리학과 화학, 천문학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과학을 잘 모르면 접근하기 어려웠다. 르 귄은 사회과학, 그 가운데에서도 인류학을 많이 참조했고, 인간의 심리와 사회구조에 대한 사고 실험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양철학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카르히데의 종교인 한다라는 도교나 불교와 대단히 비슷하다. 이 작품의 제목 역시 그런 분위기에 젖은 카르히데의 민요 첫 구절에서 딴 것이다. "빛은 어둠의 왼손,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이며 죽음이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맞잡은 손처럼, 결과가 과정인 것처럼." 전체주의적인 사회구조로 가려 했던 오르고레인의 종교는 일신교이다. 르 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류 흐름을 거의 모두 전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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