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기업 앞에 '유죄' 부모만

입력
2023.12.1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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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김미숙(가운데)씨가 아들 김용균씨 사망사고 당시 원청업체 대표인 김병숙 전 서부발전 사장의 무죄가 확정된 후 참담한 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김미숙(가운데)씨가 아들 김용균씨 사망사고 당시 원청업체 대표인 김병숙 전 서부발전 사장의 무죄가 확정된 후 참담한 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딱 5년 전 오늘(14일)이었다. 보통 아무런 표정 없이 일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근무 중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죽은 아들을 떠올리며 마지막 힘을 짜내 발언을 이어가던 김미숙씨를 처음 봤다. 사고 현장을 직접 본 그녀는 "후회를 많이 했다"며 울었다. "내가 이런 곳에 아들을 맡기다니." "(열악한 근무환경을 알았다면) 아무리 일자리 없어 평생 놀고먹어도 이런 데 안 보냈을 거다." 한탄에는 자책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마땅하지 않은 그 마음에, 황망한 그 죽음에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눈물은 흘렀다.

2018년 12월 11일 새벽,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던 김용균(당시 24세)씨의 사망 사고 이야기다. 입사 3개월차 신입직원의 죽음은 '위험의 외주화'라는 묵직한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졌다. 김미숙씨는 거리로 나섰다. 투사가 된 어머니를 보고 수많은 국민이 공분했다. 그 힘으로 일명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통과되고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이 제정됐다. 기업, 특히 원청이 안전한 노동환경에 제대로 책임지도록 한 법들이다. 일터의 죽음이 예사인 잔인한 사회에서, 그래도 조금씩은 벗어나고 있다고 믿게 한 움직임들이다.

그 무심한 환상은 통렬하게 깨졌다. 보도사진으로 김씨의 눈물을 다시 대면한 지난 7일이었다. 그녀는 대법원 앞에서 "원청의 책임"을 외치며 울고 있었다. 판결의 요지는 2인 1조 근무 등 안전조치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한 것을 사측, 특히 원청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렵단 것이다. 중처법 시행 전 기소된 재판이었다. 하청이 안전에 소홀한 건 원청에 소위 가성비를 보여줘야 살아남는 불공정한 구조 때문인 실상이 법리적으로 얼마나 가뿐히 외면당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셈이다.

2019년 12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에서 열린 '고(故) 김용균 태안화력 사망사고 현장 조사 결과 공개 브리핑' 기자회견에서 김씨의 부모님(오른쪽 책상 앞)은 물론 현장 조사에 참여한 모두가 발언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연합뉴스

2019년 12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에서 열린 '고(故) 김용균 태안화력 사망사고 현장 조사 결과 공개 브리핑' 기자회견에서 김씨의 부모님(오른쪽 책상 앞)은 물론 현장 조사에 참여한 모두가 발언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연합뉴스

그런데 국회로 고개를 돌렸더니 더 절망적이다. 급한 민생법안을 처리하자고 모인 여야 대표들이 중처법 유예안을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2021년 1월 시행 후 벌써 3년이다. 그런데도 준비 미흡을 이유로 중처법의 50인 미만 사업체 적용 시기를 2024년에서 2026년으로 2년 더 유예하자는 목소리가 그저 놀랍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사업자의 무려 84%(지난해 기준)가 50인 미만 사업체인데도 말이다.

2년을 유예한다고 가정하자. 지난 5년간, 그러니까 김용균씨 사망 이후 적어도 2명이 매일 일하다가 숨졌다. 그럼 앞으로 2년은 또 얼마나 더 많은 부모가 무죄가 된 회사 옆에서 본인이 유죄인 것처럼 마르지 않는 눈물을 흘리게 될까. 또 얼마나 더 많은 부모가 자식이 겪은 사회적 죽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투사가 될까. 유예는 쉬운 후퇴일 뿐 전진을 위한 것일 수 없다.

"미국 국적 친구를 기다린다 / 심야 공항 터미널은 지나치게 환하다 / 그녀에게 이 도시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왼쪽 옆으로는 불매운동 중인 제과업체의 체인점이 있다 / 빵공장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입국장')

최근 출간된 김이듬의 시집을 읽다가 고민했다. 이 나라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를. 매일 일터로 향할 때는 유언장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는 나라라고. 저출생과 인구감소를 걱정하면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터에는 무감각한 나라라고. 그런 소개말만 맴돈다. 그냥 가볍게 'BTS의 나라' '손흥민의 나라'로만 말하기엔 허망하게 떠난 생명이 너무 많다. 뭐가 됐든 한참 잘못된 일이다.


▶참고기사

故김용균 어머니 "억만금보다 소중한 아이, 일하다 죽으면 벌금 432만 원뿐이라니"(2023년 12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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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20618060002868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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