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2절 가사 같을지라도

입력
2023.12.10 22:00
26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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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삼성그룹 이건희 선대회장의 1993년 신경영 선언에 이어 1995년 신문 지면을 뒤덮은 삼성그룹의 시리즈 전면 광고의 카피 문구이다.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위 문구가 뇌리에 선명한 걸 보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 메시지가 꽤 강렬했던 것 같다.

그런데 2등만 아니라 노래 2절도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2절로 끝나는 노래건, 4절 이상까지 있는 노래건 말이다. 2절로 된 노래는 1절만 부를 때가 많고, 2절 가사도 1절 가사를 변형하여 반복하는 경우가 흔해 주목도가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4절 이상인 노래는 가사 전체가 기-승-전-결의 구성을 취하곤 하는데, 승에 해당하는 2절은 보통 도입부인 1절과 클라이맥스인 3, 4절을 이어주는 데 그쳐 밋밋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절 가사가 없는 노래는 뭔가 허전하고 곡의 완결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나아가 2절 가사가 1절 가사를 반복, 보완하는 것을 넘어 곡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곡의 완성도를 높이는 예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를 경험한 일이 있는데 우리 가곡 '그 집 앞'을 들으면서였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중학교 음악 시간에 배워서 그런지 이 곡을 생각하면 중학생 나이의 10대 소년이 노랫말의 화자로 느껴졌다. 그 소년이 같은 동네의 또래 소녀를 좋아해서 그 소녀 집을 지날 때마다 가슴 설레 하며 그 집 앞에 멈춰서서 두리번거리다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지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상되곤 했다. 그런데 30대 초반쯤이었나, FM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2절까지 집중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노래 화자는 더는 짝사랑에 가슴 설레던 풋풋한 10대 소년이 아니라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가는 30대 초반쯤 남자로 다가왔다. '그 집 앞'이 '이 집 앞'으로 바뀌었으니 둘 사이가 가까워지는 일이 있었던 듯하나, 이제는 '옛날 일'이 되어버렸으므로 결국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고 그녀는 더는 그 집에 살지 않는 것 같다. 남은 것은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다시 '그 집 앞'을 지나는 남자의 쓸쓸한 뒷모습뿐. 이처럼 2절은 1절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여 곡의 완결성을 높이고, 때론 1절 가사를 재해석하게 하기도 한다. 위 1절 가사의 '그리워'에 주목하면 1절도 지나간 옛사랑을 추억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처럼.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나이가 들수록 연말이 되면 나름 한 해를 열심히 살았다는 충만감보다는 아쉬움, 무기력감, 실패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도 각별히 기억하지도 않는 2절 가사 같은 느낌이랄까. 2절이면 어떠하리, 잘 부르면 되지라고 단순히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1절이 담아내지 못한 것을 포착하여 곡을 더 풍성하게 완결 짓는 보석 같은 2절 가사도 많지 않을까. 새해는 2절 가사 같아 보이는 삶의 한 절이라도 노래하듯이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우재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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