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 무릎 꿇리는 놀이인가"...페미니즘 백래시 강해졌다

입력
2023.12.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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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페미니즘 백래시 잔혹사]
2016년 '넥슨 성우 해고' 시작으로
2021년 GS25 포스터 '집게손' 논란
기업·정치권 무비판 수용이 세 키워
"비판적 대응, 개인 보호 방침 필요"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영상 캐릭터 '엔젤릭버스터'가 집게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영상 캐릭터 '엔젤릭버스터'가 집게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난달 국내 거대 게임사 넥슨이 공개한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영상에 남성을 비하하는 집게손가락(집게손) 모양이 등장하면서 남성 혐오(남혐)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논란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해당 장면을 그린 애니메이터 색출로 이어졌고 나아가 업계 종사자의 사상검증을 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으로까지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해당 장면을 그렸다고 잘못 알려진 한 여성의 신상 정보가 무분별하게 유출됐고,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은 넥슨은 머리부터 조아렸다. 해당 영상을 만든 넥슨의 하청업체는 업계 퇴출 위기에 몰렸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남혐 논란을 촉발해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백래시(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심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남성 이용자들이 대다수인 온라인 집단이 페미니스트를 색출해 징벌하고, 이들이 주요 소비층인 기업은 이를 묵과하거나 동조하는 현상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백래시는 한국 사회가 안전하다는 감각을 무너뜨린다"며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2016년 넥슨 '페미' 논란 여성 성우 해고

2016년 7월 18일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에서 '티나' 캐릭터를 맡았던 성우 김자연씨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티셔츠를 입고 올린 사진. 트위터 캡처

2016년 7월 18일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에서 '티나' 캐릭터를 맡았던 성우 김자연씨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티셔츠를 입고 올린 사진. 트위터 캡처

대표적인 국내 페미니즘 백래시는 2016년 나타났다. 2015년 국내 페미니즘이 대중화하자 20대 남성 중심의 남초 커뮤니티가 반격을 주도했다. 2016년 7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 '티나'를 맡은 성우 김자연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가 집중 공격을 받았다. 결국 넥슨은 김씨를 교체했다.

같은 해 페미니즘 서적을 읽거나 관련 물건을 사용한 여성 연예인에 대한 공격도 빈번했다.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일부 남성우월주의자 누리꾼들로부터 사이버불링(온라인상 집단적 괴롭힘)을 당했다. 걸그룹 에이핑크 멤버 손나은도 '여성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 문구가 적힌 휴대폰 케이스를 썼다가 남초 커뮤니티에서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등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2021년 5월 GS25에서 공개한 캠핑용품 경품 안내 포스터. 소시지를 집는 집게손가락 모양 일러스트가 들어가면서 남성 성기 크기를 비하하는 남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GS리테일 제공

2021년 5월 GS25에서 공개한 캠핑용품 경품 안내 포스터. 소시지를 집는 집게손가락 모양 일러스트가 들어가면서 남성 성기 크기를 비하하는 남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GS리테일 제공

2021년 페미니즘 백래시가 더 강해졌다. 2021년 5월 편의점업체 GS25에서 선보인 캠핑용품 경품 행사 포스터에 등장한 '집게손'을 두고 남초 커뮤니티가 남혐 논란을 제기했다. 이번엔 정치권까지 반응했다. 당시 2030 남성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핫도그를 (집게)손으로 집어먹는 캠핑은 감성캠핑이 아니라 정신 나간 것"이라며 혐오 공격에 가담했다. 온라인에서 촉발된 논란에 업체는 백기를 들었다. GS25는 담당 디자이너를 징계하고, 마케팅 팀장을 교체했다.

온라인 특정집단이 제기한 논란이 직원 징계 등으로 현실화하자 공격 수위가 높아졌다. 남초 커뮤니티는 '집게손' 표식이 나오는 포스터와 영상 등을 계속 찾아내 좌표를 찍고 무차별적으로 비난했다. 불매 운동으로 기업을 압박하거나 민원과 댓글 공격으로 공공기관을 공격했다. 2021년 카카오뱅크, 서울경찰청, 국방부 등이 남혐 논란 피해를 입었다. 결국 각 기업과 기관들은 사과 입장문을 발표하며 해당 이미지를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기업 무릎 꿇리기 놀이”… 사회가 키운 백래시

한국여성민우회 등 9개 여성·시민단체가 지난달 28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게손' 논란에 사과문을 발표한 넥슨이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무책임하게 용인했다며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한국여성민우회 등 9개 여성·시민단체가 지난달 28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게손' 논란에 사과문을 발표한 넥슨이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무책임하게 용인했다며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페미니즘 백래시가 잦아지는 이유는 특정 집단의 억측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사회의 책임이 크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여러 기업이 주요 소비자 집단의 불평을 잠재우겠다고 억측을 검증 없이 받아들였다는 게 문제"라며 "이들 주장이 현실성 있는 문제의식인 양 여겨지자 정치인들도 이를 포퓰리즘 차원에서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 백래시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 성장률이 떨어질 때 일부 시민이 외국인·흑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표적 삼아 '이들이 우리 사회를 망쳤다'는 확증편향을 강화하듯, 국내에선 남성 청년층이 표적을 페미니스트로 삼고 있다"고 분석했다.

백래시가 강화되는 사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백래시가 반복되면 직접적 공격 대상인 여성은 물론, 이를 주도하는 20대 남성도 피해를 입는다"며 "여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공존은 더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 이번 넥슨 사태에서도 다른 게임 영상에 남혐 표식이 있는지 여부를 전 직원이 야근을 하면서 검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내부 불만이 표출됐다.

온라인에서 촉발된 백래시는 실제 범죄로도 이어진다. 지난달 4일 경남 진주시의 편의점에서 자신을 '남성연대' 회원이라고 밝힌 한 20대 남성이 머리가 짧은 20대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페미니스트'라고 공격하며 무차별 구타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 교수는 "범죄 가해자 자체는 소수일지 몰라도, 이런 사태를 지켜봐야 하는 국민 대부분이 불안과 공포를 겪으면서 사회가 안전하단 감각이 무너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백래시가 혐오에 기반한 놀이 문화로 변질됐다는 진단도 나왔다. 이효린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남성 혐오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은 실제 자신들이 침해당한 인권 존엄성을 되찾으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다"며 "단지 특정 개인이나 기업을 무릎 꿇리는 데서 영향력을 과시하며 재미를 찾으려는 놀이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개인 권리, 백래시에도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한국여성민우회 등 9개 여성·시민단체가 지난달 28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넥슨의 사과를 촉구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한국여성민우회 등 9개 여성·시민단체가 지난달 28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넥슨의 사과를 촉구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혐오사회를 막기 위해선 백래시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 강하게 요구된다. 신 교수는 "성폭력 범죄와 마찬가지로 백래시 역시 나중에 대응하면 늦고 즉시 중단하는 게 중요하다"며 "'인지적 거리두기'를 통해 사건 전말이 밝혀지기 전까지 비판적 자세를 유지하고, 특정인을 공격하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무비판적으로 백래시에 동조했다가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은 정정 및 사과 절차를 확실히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도 비판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넥슨처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되레 내부 분란과 다른 소비층의 외면 등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윤김 교수는 "집단적 좌표 찍기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기업들 간 공동 매뉴얼을 마련해 대응해야 '저 기업은 페미가 묻었으니 불매한다'는 말에 더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또 "담당 디자이너 등 개인을 고용 위협이나 사이버불링으로부터 보호할 방침을 세워야 한다"며 "개인의 권리가 온라인상 혐오 공격으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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