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고 메시지 없는 민망한 PT
서오남 내각·시민권 퇴행 한국 보는 듯
선진국다운 가치 내면화해야 할 때
2030 엑스포 경쟁 프레젠테이션(PT) 마무리 영상에 대한 혹평은 “대체 언제 적 ‘강남스타일’이냐”로 요약된다. 진부하고 메시지는 없다. 사실은 PT 전체가 그랬다. 한덕수 국무총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60·70대 남성 발표자들이 나와 ‘한강의 기적’을 강조했다. 패럴림픽 메달리스트 등 다양한 분야 여성들이 발표자로 나선 이탈리아, 아이들을 등장시키고 ‘미래’를 강조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하면, 내용과 스타일 모두 시대를 읽지 못했다. 소프트 강국, 한국은 어디로 갔나 싶다.
이 시대착오가 2023년 한국의 징후인 것만 같아 불길하다. PT 발표자 면면은 서오남(서울대 출신·50대·남성) 내각과 다를 바 없고, 여성을 구색으로 활용한 콘셉트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한 정부에서 놀랍지 않다. ‘한강의 기적’을 추억하며 산업화 시대로 되돌아가는 듯한 움직임은 노동시간 연장 시도 등에서 익히 보였다. 정부는 ‘글로벌 중추 국가’를 외교 비전으로 내세웠는데 글로벌 스탠더드조차 외면하는 퇴행의 징후가 우려스럽다.
이런 변화를 보수 정부라서 할 법한 정책 변경쯤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의 기준선을 맞닥뜨린 한국이 뒷걸음질 치는 것에 가깝다. 1일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세계노동기구(ILO) 결사의자유위원회, 유엔 인권위원회 같은 국제기구가 여러 번 권고한 것이다. 선진국 중 우리나라처럼 쟁의의 주체, 목적, 시기와 절차, 수단을 깐깐히 따져 합법 파업을 하기 어려운 나라는 없다. 개별 책임에 따라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한 개정 조항은 대법원 판례에도 부합한다. 한 총리는 이 법이 “건강한 노사관계를 크게 저해”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천문학적 손배 가압류로 배달호·김주익씨 등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사관계가 건강한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3번째, 인구 1인당 6번째로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기후악당국이란 사실도 국제사회는 다 안다. 2010년 브뤼셀에서 취재차 만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공무원으로부터 “한국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탄소 규제를 모른 체한다)”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낯이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런 나라 정부가 하루아침에 일회용품 규제를 철회하고 신재생 예산을 대폭 삭감한 예산안을 제출했으니 미래세대에 너무 무관심하고 무책임하다. 대체로 독재 국가에서 이뤄지는 기자 압수수색에 대해 “1990년대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 당국이 이런 조치를 취한 적은 거의 없었다” “1980년대까지 지속된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을 연상시킨다”고 한 것은 미 언론 뉴욕타임스(11월 10일 자)와 뉴요커(9월 30일 자)였다. 대구시의 퀴어문화축제 해산 행정대집행은 미 국무부 국가별 인권보고서에 문제 사례로 포함될 전망이고, 최근 아시아 8개국 대사관은 외국인 노동자 지원센터 예산을 전액 삭감한 정부에 우려 공문을 보냈다.
선진국이 된 한국은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노사관계로 성장할 수 없다. 옳지도 않지만 가능하지 않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건 더 이상 미덕이 아니고, 외국인을 배제한 한민족 노동력으로는 멈춰 설 업종이 한둘이 아니다. 성평등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최저 출생률을 경신할 뿐이다. 인류 보편의 가치와 동떨어진 국익을 주장했다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거나 비난받기 십상이다. 노조와의 동반 관계, 일-가정 양립, 성평등, 다양성 강화, 기후행동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존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치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보수든 진보든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돌파하며 조금씩 전진했다. 선진세계의 보편 가치를 내면화하는 게 이 시대의 과제다. 윤석열 정부는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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