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통 남 행복

입력
2023.12.04 04:30
27면

종교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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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그래야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신명기 24:19).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자신의 밭에 있는 소산을 싹쓸이하지 않고 적당히 놔두는 것이 미덕이었다. 아니 하늘의 명령이었다. 참 훈훈한 풍습이고 신앙이다.

이런 명령을 한 번만 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당신들은 포도를 딸 때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20-21).

특히 이런 배려를 특정한 세 부류에 집중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생활보호대상자는 고아와 과부, 외국인이었다.

먼저, 부모가 없는 아이는 당연히 보호 대상에 속했다. 또 지금은 '돌싱'이라 불리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 혼자된 과부는 여러 위험에 쉽게 노출됐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외국인을 지목한 것이 좀 의아하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당시 콧대 높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은 적잖게 외국인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가슴 뭉클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신들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22). 이스라엘 민족도 한때는 외국에서 막노동하며 살아가던 불우한 시절이 있었다. 그때 힘겨웠던 고생을 떠올리며, 지금 자기 땅에 와서 어렵게 생활하는 외국인들에게 친절을 베풀자는 말이다.

과거 내가 겪었던 어려움은, 지금 남도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 사회 윤리고 신앙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못된 꼰대가 꼭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을 남도 꼭 겪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내가 싫어하는 건 남도 싫다. 자기가 힘들었던 걸 왜 남은 겪길 바라는지.

"나는 이다음에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군대에서 동기나 후임들과 종종 나누던 말이다. 먼저 왔다며 과도한 군대 놀이를 하던 선임들 때문에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많은 후임을 두게 되었을 때, 우리 가운데는 그렇게나 싫어하던 군대 놀이를 즐기는 녀석도 생겼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누구든 살다 보면 부당함과 차별, 소외, 패거리 문화에 시달리고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한국의 조직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어느 세대에서는 반드시 청산해야, 우리는 자녀에게 안녕과 행복을 물려줄 수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을 남을 위한 배려로 승화시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사회 윤리다.


기민석 목사·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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