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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가출 소년이 상원 청문회 '영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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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원의원 선거를 앞둔 1944년 가을 어느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버넷 메이뱅크(Bernet R. Maybank, 1899~1954, 민주)가 클레어든 카운티의 작은 마을 섬머튼(Summerton)에서 유세를 벌였다. 민주당 텃밭이었고, 자기당 후보 지원유세였다. 별 긴장감 없이 유세를 마친 그는 승용차로 향하며 유권자들에게, 인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워싱턴D.C에 오면 제게 들러 주세요!”
어머니 심부름으로 닭 두 마리를 안고 장에 나온 만 13세 흑인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소년은 당돌하게 메이뱅크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도 당신을 찾아가도 되나요?” “물론이지, 꼬마야!” 흑백 분리차별의 ‘짐 크로 법’ 시대였다.
며칠 뒤 소년은 빈 밀가루 부대에 옷을 담고 모아둔 비상금 몇 달러를 챙겨 몰래 집을 나섰다. 목화밭 소작농가의 14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단 한 번도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던 그는 버스로 인근 도시 섬터(Sumter)까지 이동, 흑인 짐꾼 등의 도움으로 워싱턴D.C행 기차에 올랐다. 훗날 그는 D.C의 유니언역이 워싱턴D.C인 줄 알았다고, 그렇게 휘황찬란한 불빛을 본 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며칠간 역 대합실에서 노숙했다.
역에서 걸어 20분이면 닿을 의사당 상원의원 사무실까지 가는 길이, 흑인 가출 소년에겐 집에서 워싱턴D.C까지의 길보다 더 멀고 험난했을 것이다. 메이뱅크는 자기만 믿고 찾아온 그에게 주급 2달러의 의사당 외부 계단 청소 '일'을 맡겼다. 엄밀히 말하면 메이뱅크가 자기 돈으로 맡긴 ‘심부름’ 같은 거였지만, 그날 이후 소년에겐 그 계단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켜야 하는 일터가 됐다.
5년 뒤 소년은 역시 메이뱅크의 추천 덕에 구내 카페로 일터를 옮겼고, 40년대 말 군복무 후 다시 의회로 복귀해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며 목욕탕 잡역부와 구두닦이 이발소 사환으로 일했고, 66년 마침내 상원 외교위원회 사무처 정식 직원이 되고, 청문회 증인들을 안내하고 행사 전반을 책임지는 코디네이터가 됐다. 바로 그가 2021년 만 90세로 은퇴할 때까지 거의 평생 의회에서 일한, '역대 최장수-최고령 연방의회 공무원' 버티 보우먼이었다.
빌 클린턴 등 훗날의 여러 미합중국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민주당의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과 각별한 친분을 쌓은 ‘캐피톨 힐의 터줏대감’이자, 외교위 청문회의 '마음이자 영혼'이었던 허버트 “버티” 보우먼(Herbert “Bertie” Bowman, 1931.4.12~ 2023.10.25)이 별세했다. 향년 92세.
1930년대 대공황기 남부 흑인 소작농의 삶은 혹독했다. 보우먼 가족의 처지도 다를바 없었다. 한겨울 칼바람이 숭숭 드는, 상수도도 화장실도 없는 흙집. 그는 눈뜨면 아궁이에 불을 지핀 뒤 밭에 나가야 했고, 겨울 한철을 빼곤 신발 없이 지내야 했다. 왕복 약 10km 거리인 학교는 당연히 걸어 다녔고, 등하굣길 백인 아이들을 태운 노란색 스쿨버스가 지나가면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남부 흑인 아이들 대다수가 그랬듯 그도 언제나 언젠가 그 뻔한 운명에서 탈출하기를 꿈꿨다. 2008년 회고록 ‘Step by Step’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기억하는 한 탈출 계획은 늘 마음 한구석에서 생명처럼 자라고 있었다.(…) 다른 어떤 것이 내 삶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내 삶을 내가 개척하고 싶었다.” 2013년 의회 매체 ‘롤콜(Rollcall)’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목화밭에서 비행기 소리를 듣곤 했고 버스가 지나갈 때면 거기 탄 사람들이 닿을 곳을 상상하곤 했다”고, “메이뱅크의 말은 그 갈망을 부추긴 일종의 선동이었고, 그의 초대는 내게 문을 열어준 셈이었다”고 말했다.
가출 당시 그의 품엔 앞서 '탈출'해 워싱턴D.C에 자리잡고 산다던 사촌형의 주소를 적은 메모지가 있었다. 하지만 유니언역에 도착해서야 메모지를 잃어버린 걸 알게 됐고, 택시 기사 등에게 사촌형의 이름을 말하며 혹시 아느냐고 묻고 다니기도 했다. 인구 1,000명 남짓이던 고향 섬머튼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그에게 메이뱅크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메이뱅크는 주지사만 5명을 배출한 사우스캐롤라이나 명문가 집안의 장남으로, 면화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 뒤 27년 찰스턴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시장-주지사를 거쳐 56년 3선 현역 상원의원으로 숨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선거에서 진 적 없는 그는 인종-민권 현안에 관한 한 언제나 남부 백인 정서를 대변한 인종주의자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서민으로 여겨 흑인 농부들과도 격의 없이 지내, 'Time’이 부고 기사가 남부의 ‘자유주의자’로 소개했을 만큼 다소 이질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보우먼의 사촌형도 수소문해 둘이 만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보우먼은 '롤콜' 인터뷰에서 “우리 남부인에겐 다른 사람들과 다른, 끈끈한 뭔가가 있(었)다”고, “그는 나를 마치 아들처럼 대하며 자기 깃 안에 품어 주었다”고 말했다.
54년 메이뱅크 사후 보궐선거로 지역구를 물려받은 스트롬 서먼드(Strom Thrumond, 당시 민주)도 ‘끈끈한 남부인’이었다. 고학으로 워싱턴D.C 루스벨트 고교를 졸업한 보우먼이 명문 흑인대학인 하워드(Howard)대에 진학하려다 성적 미달로 보충 교육(remedial courses) 이수 통보를 받고 절망하던 무렵이었다. 그가 대학에 지원한 사실을 알고 있던 서먼드는 어느날 그에게 입시 결과를 물었고, 사정을 듣고는 곧장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밥(Bob), 지금 내 곁에 젊은이가 한 명 있는데, 당신네 학교에 지원했다가 거절을 당했다는군. 당신 학교 예산의 80%를 정부가 대준다는 걸 모르나?” 보우먼은 저 에피소드를 전하며 “믿기지 않겠지만 서먼드는 ‘보이(boy, 흑인 멸칭)’가 아니라 젊은이(young man)’라고 나를 지칭했다”고, 2012년 npr 인터뷰에서 말했다. 인종 분리차별 철폐와 흑인 선거권 보장 등을 골자로 한 57년 시민권법에 반발해 세계 의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24시간 18분의 필리버스터(Filibuster, 의사진행방해)를 벌였던 맹렬한 인종주의자 서먼드의 일면이었다. 보우먼은 하워드대(행정학)에 입학해 2년 뒤 중퇴했다.
의회 잡역직을 떠돌던 보우먼을 66년 상원 외교위(FRC) 서기직에 발탁한 것은 당시 외교위원장이던 윌리엄 풀브라이트(William Fulbright, 아칸소, 민주)였다. 이듬해 인턴으로 채용된 조지타운대 졸업반 빌 클린턴을 처음 만난 게 거기였다. 아칸소 빈민가에서 흑인들과 어울리며 불우하게 성장한 클린턴은 처음부터 보우먼과 죽이 맞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성 팬이었던 둘은 서류를 함께 나르며 의사당 복도에서 엘비스의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곤 했다고 한다. 둘(과 힐러리)의 우정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고, 힐러리가 대선에 출마하고 또 국무장관이 된 뒤로도 이어졌다. 빌 클린턴은 보우먼의 회고록 서문에 이렇게 썼다. “버티와 같은 이들은 신문에 등장하지 않고 국민 대다수가 이름도 모르지만, 그들은 신문에 나오는 이들이 멋진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일 최선을 다한다. 버티는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드는 시민의 전형이다.”
뉴욕타임스는 의사당 잡역직을 ‘언더그라운드 맨’이라 소개했고, 보우먼은 책에서 ‘인비지벌(Invisible)’이라 표현했다. “의원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란 의미였다. 잡역부 시절 맨 처음 들은 지침도 “무슨 말이든 흘려들어야 한다”는 거였다. 만년의 그는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흘려 듣지 못한 악의 없는 일화들을 들려주곤 했다. 의회 구두닦이 시절, 단골 중 한 명이 당시 상원의원 린든 존슨이었다. 멋쟁이로 유명했다는 존슨이 “버티, 제대로 닦았나? 내 얼굴이 비치는지 볼까?”라고 해서 그가 “(흑인인) 제 얼굴보단 의원님 얼굴이 더 잘 비칠 겁니다”라고 대꾸했다는 일화. 흑인 잡역부들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셔츠도 선뜻 벗어줄 만큼 다정하다가도 기분이 상하면 ‘꺼져버려’라고 욕을 퍼부을 만큼 흑인 잡역직들과 친근(?)해 특히 인기가 많았다는 존슨은 의원 전용 이발관 단골이기도 했다. 존슨의 인권정책 등을 못마땅해 하던 동료 의원들은 이발소 입구에 파수꾼을 세워둔 채 존슨 험담을 일삼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존슨이 등장하면 ‘온순한 비둘기(lovey-dovey)처럼 굴었고, 존슨은 “다들 내 험담한 거 다 안다. 다만 법안에 허튼 내용을 집어넣으면 국물도 없다”고 엄포를 놓곤 했다고 한다.
의회에서의 그의 세월은 냉전으로 시작해 50년대 브라운 v. 교육위 청문회- 60년대 인권운동- 70년대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청문회 등 가히 미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이어졌다. 24개 상원 위원회(상임위 16개) 중 외교위는 예산-세출위원회와 함께 가장 막강한 상임위 중 하나로, 8명의 대통령과 19명 국무장관을 배출한 국내 및 세계 정치의 주무대다. 거의 매달 열리는 입법- 감시(감독)- 조사- 인준 청문회에서 코디네이터는 증인 안내 등 의전과 행사 진행, 마이크나 필기도구 관리까지 세심한 안목과 경험이 요구되는 자리다. 위엄과 품위, 예절 또한 갖춰야 했다. 그는 자신의 품격으로 상원의원들과 청문회의 품격을 지탱했다. 그에게 ‘애티튜드’에 대한 조언을 청하는 초선 의원들도 있었다. “보우먼은 우리를 더 멋져 보이게 만들어주곤 했다”던 공화당 전 상원의원 척 헤이글(Chuck Hagel)의 말이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보우먼은 1990년 작고한 장인의 사업(리무진 서비스업)을 챙기느라 외교위 청문회 부(副)코디네이터 직에서 사임했지만 비상임 컨설턴트로서 의회와의 인연을 이어갔고, 9년 뒤 외교위원장이던 제시 헬름스(Jesse Helms, 노스캐롤라이나, 공화)의 요청으로 다시 정(正)코디네이터로 복귀했다. 헬름스 역시 시민권과 장애인-여성 인권, 낙태 등 거의 모든 이념적 이슈에서 둘째가라면 화를 낼 만큼 공격적인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보우먼과는 각별했다.
흑인 사회의 공적(公敵)이나 다름없을 거물 보수 정치인들과의 두터운 친분을 두고 뒷말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매체 인터뷰 때마다 반복된 질문도 그거였다. 그들의 모욕적인 인종차별 발언이나 연설을 듣고도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 2012년 인터뷰에서 그는 “의원들 중 누구와도 흑인 처우를 두고 토론한 적은 없다. 그들에겐 그들의 의제(agenda)가 있었고, 내겐 내 의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의제란 “살아남는 것, 또 가능하다면 남을 돕는 것”이었다. 2008년 인터뷰에서는 “만일 당신이 듣고자 하는 말이 이런 거라면, 그(Thurmond)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그는 무척 많은 일을 했다. 내가 아는 한 그에겐 나쁜 면보다 선한 면이 훨씬 많았다.” 그는 그들과의 친분을 우정이라고 말했다.
물론 우정을 나눈 진보 정치인들도 적지 않았다. 1971년 4월 23일, 베트남전 반전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미 육군 베테랑 존 케리(John Kerry)를 맞이한 것도 보우먼이었다. 그날 케리는 현역 시절 겪은 베트남전의 진실과 혐오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닉슨 대통령이 ‘전쟁에서 패배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지금도 전장에선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민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연 당신은 그들에게 그런 이유로 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하는 병사가 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케리는 2004년 외교위 상원의원(매사추세츠주)으로서 보우먼과 재회했다.
연방 상원 공무원 후생복지기구인 ‘연방상원신용조합’(USSFCU)은 2019년 전 의장인 보우먼의 공로를 기려 조합 신청사를 ‘버티 보우먼 빌딩’이라 명명했다. 그는 두 번째 아내인 일레인 킹 보우먼(Elaine King Bowman, 2009 작고)과 5남매(양녀 1명 포함)를 두었고, 심장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척 헤이글 전 의원은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매우 중요한 미덕인 예의(civility)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고 회고했고, 외교위 전 의장 밥 코커(Bob Corker)는 “우리는 전쟁과 죽음, 파괴 등 정말 끔찍한 사안들을 두고 청문회를 열곤 했고 또 그게 우리 일이었지만, 버티는 이 세상의 살아 있는 선의 본보기로 거기 늘 존재했다”고 애도했다. 존 케리는 자신의 SNS 엑스(옛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이 상원 외교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있다면 버티 보우먼의 커다란 미소와 호탕한 웃음, 곰처럼 껴안는 그의 포옹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의 직함은 ‘청문회 코디네이터’였지만, 한마디로 ‘(청문회의) 마음이자 영혼(Heart and soul)’이라 해도 됐을 것이다.” 그의 오랜 벗 빌 클린턴은 “만일 당신이 워싱턴의 첫 직장에서 첫 일을 하게 된 스무 살 학생이라면 품 속에 들어 보호받고 싶은 딱 그런 타입의 사람이 그였다. 그는 영민하고 푸근하고 헌신적이면서도 경험과 지식을 베푸는 데 늘 관대했다”고 그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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