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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승객 1/4토막... 전국 행선판만 쌓인 상봉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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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홍천, 원통, 거진, 청주, 수원, 여주... 때 묻은 흰색 플라스틱 표지판에 전국 곳곳의 지명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서울 중랑구 상봉터미널의 마지막 영업일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수년에 걸쳐 축소돼 온 터미널 대합실에 마지막까지 남겨져 있던 행선지 표시판이다.
이 행선판들을 달고 승객을 기다리던 버스가 수십 대였던 적도 있었지만 현재 이 중 쓰임새가 있는 것은 ‘상봉동’, ‘구리’, ‘문막’, ‘원주’ 네 종류뿐이다. 구리와 문막은 이날까지 상봉터미널에 정차하는 유일한 노선인 상봉-원주 구간의 중간 정류장이다.
시대의 변화에 휩쓸려 예기치 못한 끝을 맞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상봉터미널의 쇠락은 예정돼 있었다. 서울시는 1970~1980년대 야심 차게 시외버스터미널 재편성을 추진하며 상봉을 포함한 6개 터미널을 계획했지만 이 중 실제로 건립돼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단 두 곳(남부·동서울)뿐이다. 상봉터미널이 1985년 영업을 개시해 1997년부터 폐쇄를 추진한 사실을 고려하면 수십 년은 기능해야 할 거점 시설이 불과 수년 만에 제 기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시내 교통과의 연계 부족이었다. 서울시는 1981년 8월 상봉터미널 부지를 결정 고시하며 “지하철역 부근에 잡아 도심까지의 연계수송이 최대한 편리하게 할 계획(”상봉동에 시외버스터미널“, 한국일보, 1981년 8월 9일 자)”이라고 밝혔지만 인근에 지하철역이 들어선 것은 1996년 7호선 상봉역이 처음이었다. 이는 운영사 ㈜신아주가 첫 폐쇄 신청을 내기 불과 1년 전으로, 상봉터미널은 이미 10여 년간 점진적으로 시민들에게 외면받아 온 셈이다. 존재감이 희박했던 강변역이 동서울터미널 준공 후 시너지를 내며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과 대조적이다.
서울시는 시내버스 노선을 다수 변경하며 상봉터미널을 경유하도록 했지만 이미 전철로 넘어가기 시작했던 시내 대중교통의 대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노선 운행 거리가 길어지자 시내버스 운행사들이 수익성 저하를 이유로 변경 노선을 준수하지 않고 정차하지 않는 문제도 발생했다.
시내 교통 여건이 완비되지 않은 채 서둘러 운영을 개시한 터미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민들의 불편은 컸고, 서울시는 결국 1989년 상봉터미널에 배정됐던 춘천·속초행 시외버스 노선을 동서울터미널에 넘기며 상봉터미널의 짧은 전성기에 종지부를 찍는다. 2만 명이 넘던 상봉터미널의 일평균 이용객은 단 10년 만에 4분의 1 토막 나며 5,000명대로 곤두박질쳤다.
상봉터미널 건립 근거가 된 당시 서울시의 시외버스터미널 시외곽 이전방침 자체가 ‘시내 교통 혼잡 해소’라는 1차적 목표만 고려한 주먹구구식 정책이었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영동, 망우(상봉) 등 서울을 방사형으로 둘러싼 6개 터미널로 시외교통 수요를 분산하려 했지만 이 중 원안대로 건립·유지된 곳은 동부(현 동서울터미널) 단 한 곳뿐이다. 얼핏 보면 6개 터미널이 시 외곽 방위마다 적절하게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봉터미널처럼 실질교통 여건이 열악하거나 시 스스로가 추진 중이던 다른 개발계획과 상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울 은평구 서부터미널은 상봉과 마찬가지로 시내교통 연계가 부실하고 열차 등에 교통 수요를 뺏겨 2015년 앞서 폐업했다. 영등포구 당산동과 (당시)강남구 서초동에 건립 예정이었던 영동·남부터미널은 동시에 추진 중이던 공동주택 단지 개발을 고려하지 못해 뒤늦게 현 남부터미널로 통합됐다. 도봉구 창동에 계획된 북부터미널은 유야무야 무산됐다. 시당국 스스로가 추진한 개발 정책과 합을 맞추지 못하고 장기적 안목 없이 ‘일단 추진하고 본’, 실제 이용객 편의와 지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도시계획의 말로인 셈이다.
무심코 지나치다 눈에 띈 어떤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연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이 광경, '이한호의 시사잡경'이 생각할 거리를 담은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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