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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네덜란드가 작지만 '큰 나라' 된 비결은..."경쟁 대신 협업하는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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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비슷한 산업군끼리 협업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관련 대학과 기업이 모이면 투자와 정책 결정이 따라오게 돼 있거든요.
비영리재단 '포톤델타' 욘 스미츠 마케팅 총괄
우리나라 국토의 40%만 한 크기에 인구는 3분의 1 수준인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6만2,000달러로 우리나라(약 3만3,000달러, 31위)보다 훨씬 높은 세계 11위에 올라 있다. 척박한 기후와 토양 위에서 전쟁 피해까지 입었음에도 이들이 다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기술 기업 성장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덕분이다. 세계적 반도체 장비 회사 ASML을 대표 선수로 한 반도체부터 양자·우주기술과 수소경제에 이르기까지 네덜란드의 첨단 기술과학은 우리나라가 최근 역량을 집중하는 미래 기술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일부터 나흘 동안 수교 후 처음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도 비슷한 배경을 지닌 강소국가끼리 파트너십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에겐 '풍차'나 '거스 히딩크 감독' 정도만 알려진 이곳에 어떤 저력이 있길래 전 세계 연구자들이 찾는 첨단 기술의 허브가 됐을까.
네덜란드는 도시마다 혁신 캠퍼스가 10개 넘게 있는데 각각 농식품, 양자기술 등 특별한 주제를 다룬다. 해당 지역에 둥지를 튼 기업이나 대학이 강한 분야가 무엇인지를 감안해 하나의 주제를 정하면 관련 인재들이 몰리고 투자가 집중되는 등 '협업'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네덜란드 남쪽 도시 에인트호번(Eindhoven)은 세계적 전자회사 필립스가 만들어 낸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지다. 130여 년 전 필립스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전 세계 공학도들이 찾아왔고 전기·전자 및 반도체 기업과 관련 스타트업들이 늘어나면서 첨단기술의 도시가 됐다. 전 세계 하나뿐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만들며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로 군림하는 ASML도, 자동차용 전자장치(전장·電裝)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기업 NXP도 모두 필립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에인트호번은 통신·센서 분야 첨단 산업인 '포토닉스'(빛에 정보나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전달하는 기술)에서도 강점을 지닌다. 필립스 기술을 바탕으로 이 도시에서 꽃피운 이 산업은 현재 에인트호번 공대를 중심으로 관련 기업과 스타트업이 모여들면서 유럽에서 가장 몸집이 큰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네덜란드 포토닉스 생태계 육성을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재단 '포톤델타'의 욘 스미츠 마케팅 총괄은 "네덜란드에서는 비슷한 산업군끼리 모여 협업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대학과 기업이 모이면 투자와 정책 결정이 따라오게 돼 있다"고 귀띔했다.
11월 7, 8일 필립스의 옛 본사 건물이었던 '에볼루온'에서는 포토닉스 산업 관련 가장 큰 규모의 콘퍼런스 'PIC 서밋'이 열렸다. 현장에선 ASML과 NXP 등 반도체 기업뿐 아니라 IMEC(반도체 연구기관), 유럽집행위원회(EC) 등에서 온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스미츠 총괄은 "에인트호번은 30년 넘게 포토닉스 생태계의 거점이었다"며 "지난해 유치한 11억 유로(약 1조5,600억 원) 투자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를 포토닉스 산업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들어 미국 정부가 네덜란드와 함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정책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반도체 협력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최형찬 주네덜란드대사는 "이제 세계는 반도체를 하나의 산업을 넘어 국가안보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라며 "기업 단위 문제가 아니라 국가 단위에서 협력과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순방에서도 윤 대통령은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ASML 본사를 찾아 반도체 공급망과 기술혁신 파트너십 강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대학이 생태계의 중심이 되는 곳도 있다. 네덜란드 중서부 작은 도시 델프트(Delft)의 델프트 공대는 2022년 기준 QS 세계 대학 순위 공학 분야 세계 10위에 올라 있다. 세계적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모여드는 만큼 항공우주부터 반도체, 양자기술 등 첨단 기술 관련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져 있다.
지난달 7일 델프트 공대 캠퍼스를 가로질러 찾아간 곳은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네덜란드 응용과학연구기구(TNO)였다. 정부 주도 연구소로 시작된 TNO 예산의 30%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나오지만 나머지는 기업 투자로 채운다. 안보, 에너지, 최첨단 기술 등 6개 분야로 나뉘어 있으며 에어버스나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주요 고객사다. 소속 석·박사급 과학자와 공학자 수만 3,600명이 넘는데 이 중 80%는 '외국인'이다. TNO 관계자는 "혁신은 다양성과 협력에서 나온다"라며 "3,000개 넘는 네덜란드 안팎의 기업이나 대학, 공공 부문과 손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선 연구자들이 석·박사생들과 함께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스타트업 창업도 활발하다. 2015년 델프트 공대와 TNO가 손잡고 만든 양자컴퓨팅 스타트업 큐테크(QuTech)도 그중 하나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관련 논문으로는 세계 5위권 안에 드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키스 에이켈 큐테크 이사는 "델프트 공대가 30년 이상 양자 연구를 이끌면서 훌륭한 연구자와 공학자가 이미 한 곳에 모여 있었던 데다 과감한 지원이 뒷받침된 덕분에 혁신이 자라날 수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네덜란드가 기술 관련 여러 산업을 동시에 키울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정부의 관심과 투자다.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우주산업 분야에만 200억 유로(약 28조 원)를 투자하기로 통 크게 결정했다. 내년 전체 R&D 예산을 올해보다 5조 원(16.6%) 줄이기로 하면서 과학계가 반발하고 나선 한국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에릭 프리츠 TNO 레이저 위성통신 연구원은 "과학기술 관련 산업은 멀리 보고 돈을 많이 써야 한다"라며 "국가가 나서 R&D 예산을 삭감하는 건 바보 같은(foolish) 짓"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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