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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느냐, 너희가 죽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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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부다. 주중에 출판사 대표 편집자로 일하다 금요일이면 고향에 내려가 밭을 일군 지 5년째다. 농산물 판매 수익은 여전히 소소하지만, 단위농협 조합원이며 농업경영체도 가지고 있다. 하여 땅과 자연, 그리고 농업에 대한 내 말과 생각은 꽤 단단한 뿌리를 지닌다고 자부한다.
그런 내가 지난여름 농사를 폭삭 망쳤다. 2~7월 부지런히 가꾸던 밭을 잡초 무성한 풀숲, 벌레와 곤충들의 낙원으로 돌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지난 7월 큰비가 내리던 때, 밭둑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꼬리뼈를 다쳤다. 엉덩이 윗부분, 몸 안쪽으로 휘어진 가느다란 뼈에 금이 가는 바람에 한 달 넘게 병원을 오가며 치료받았다. 의자에 앉는 일조차 버거운 마당에 온몸의 근육을 동원해야 하는 농사일은 언감생심이었다. 부모님이라도 고향 집을 지키고 계셨더라면 나았을 텐데. 아버지가 봄부터 대퇴부 관절 통증과 전립선 문제로 고생하시더니, 7월 초에는 텃밭에 나가 일하던 엄마가 손목 골절 사고를 당했다. 엄마의 수술이 끝난 이후 부모님은 종합병원 인근 동생네 아파트로 잠시 거처를 옮겨 치료와 휴식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8월 무더위의 내 밭은, 돌보는 손길 없는 무주공산이 되고 말았다.
9월 초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찾아간 밭에는, 말 그대로 환장할 광경이 펼쳐졌다. 지난 7월 뙤약볕 아래 쪼그려 앉아 한 포기 한 포기 심었던 서리태콩과 각시동부, 들깨 묘목은 어른 허리만큼 자라나 얽힌 환삼덩굴과 명아주, 쇠비름에 묻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탐스럽게 익어 몇 차례 수확했던 고추는 탄저병에 걸려 땅으로 쏟아져 내리고 가지와 토마토, 오이 덩굴도 거침없는 벌레들의 기세에 눌려 시들고 썩어 나갔다.
장화를 챙겨 신고 마구잡이로 얽힌 풀들과 거미줄을 헤쳐가며 밭으로 들어갔다. 회생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토마토밭부터 정리하자며 허리를 숙이는데 거미인지 쐐기인지 모를 제법 묵직한 생명체가 정수리에 앉는 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털어내려는 찰나, 왼손 약지가 따끔했다. 왕벌에 쏘인 것이다. 벌침 박힌 손가락은 뻑뻑하게 부어오르고, 응급 처치를 하려고 나와보니 옷으로 가리지 못한 팔뚝 곳곳에 온갖 벌레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사이 풀숲 곳곳에 둥지를 튼 녀석들이 총공세를 퍼붓는 참이었다. 이런 젠장!
벌침 빼낸 자리에 약 바르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낫을 쥐고 밭으로 갔다. 어차피 여름 농사는 물 건너갔다. 다만 토실토실 익어가는 저 잡초 씨앗들을 서둘러 제거하고 가을 작물들의 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이대로 밀리느냐, 싸워 이기느냐… 적장의 목을 쳐내듯 풀을 제거한 뒤 갈아엎은 땅에 배추와 무, 갓, 쪽파를 심었다.
그렇게 복수전을 치르며 키워낸 작물들을 거두어 주말에 김장김치를 담갔다. 마당 가득 들어찬 200포기 배추를 절이다가 저 아래 텅 빈 밭을 내려다보았다. 풀들이 나무처럼 자라나던 여름철 풍경이 떠오르고, 미친 듯 휘둘러대는 내 낫질과 함께 도려내진 곤충과 벌레들의 집이 환영인 양 그려졌다. 이제 나는 자연의 냉엄한 이치 하나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삶'이란 때로 ‘무자비’의 다른 말이 된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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