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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와 뗏목

입력
2023.11.27 04:30
27면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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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제목과 가사가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닮았다. 시는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으로 시작하는데, 노래 가사와 대비해 보면 남자(배)는 당신(행인), 여자(항구)는 나(나룻배)와 연결된다. 한쪽은 묵묵히 기다리고 베푸는 존재, 다른 쪽은 이용하고 떠나는 존재다. 노래는 한쪽이 ‘쓸쓸한 표정 짓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다른 쪽을 원망하지만, 시는 '흙발로 나를 짓밟'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가는 희생이 기껍다. 이 희생은 만해 특유의 종교적 심성이다.

희생은 체념으로까지 이어진다.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간다는 대목이다. 결연한 구도자인 듯,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의 쓸쓸한 상념을 슬쩍 비춘다. 그래서 '나룻배와 행인'은 경전이 아닌 한 편의 시다.

만해의 이 같은 비유가 훨씬 이전부터 불교에서 전해 왔는지, 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의해(義解) 편의 진표전간(眞表傳簡)에 나온다. 진표는 신라 경덕왕 때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다. 젊었을 때 그는 미륵보살을 만나자고 각고면려 끝에 드디어 간자(簡子) 189개와 함께 명령을 받는다. "이 가운데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다. 나머지는 침향과 전단향 나무로 만들어 여러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세상에 법을 전하고, 사람을 건넬 나루터와 뗏목을 만들어라."

과문한 탓에 ‘사람을 건넬 나루터와 뗏목’이라는 표현이 삼국유사보다 앞서 어디에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삼국유사가 처음이라면 진표는 이 깨달음의 강에서 누구든 기꺼이 건네줄 도구로 나루터와 뗏목이 된 처음 사람이다. 삼국유사는 그런 진표를 두고 벌어진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 두 가지를 적어놓았다. 첫째, 물고기와 자라가 진표를 바닷속으로 모시고 들어가 가르침 받은 일. 둘째,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 진표를 만나자 무릎을 꿇고 운 일.

첫째 이야기는 강릉 바닷가에서, 둘째 이야기는 이보다 앞서 속리산으로 가는 길에서 벌어졌다. 뒷이야기가 더 자세하다. 소가 우는 모습을 보고 수레에 탔던 사람이 놀라 까닭을 물었는데, 진표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소가 겉은 우둔하나 속은 밝은 모양'이라고 태연하다. 나루터와 뗏목이 되어주기로는 사람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수레 탄 사람도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 '짐승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하랴' 탄복한다.

이야기야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물고기가 무슨 설법을 들으며, 소가 도 높은 스님을 어찌 알아보고 무릎 꿇었을까. 그러나 세상은 이런 이야기가 비의(比擬)하는 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부디 전자가 흘러넘치길 빌밖에.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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