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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왜 제주도를 최후 거점으로 삼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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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7> 제주 항파두리 성(城)
‘항파두리’(缸波頭里ㆍ제주 애월읍)는 고려시대 삼별초가 여몽(麗蒙) 연합군에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전멸당한 성(城)이다. 애월 바다가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750년 전 항파두리성의 비장함은 로마군에 항전하다 전원 옥쇄한 이스라엘 마사다(Masada) 요새의 최후 전투와 비교될 만하다.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강화를 떠난 후 3년을 버텨냈지만, 결국 허무하게 막을 내린 무대이기도 하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지만, 항파두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대단히 복합적이고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반군’인 삼별초를 완전히 진압한 장소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휘호(抗蒙殉義碑ㆍ1978년)를 남긴 것처럼, 외세에 끝까지 저항한 끈질긴 민족정신이 서린 유적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반도 역사에서 제주도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된 계기도 됐다.
항파두리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3.6㎞로 확인되는데 이는 경기도의 거점 성들보다 훨씬 큰 규모다. 항파두리라는 이름은 몽골 장수 홍다구(洪茶丘, 1244~1291)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용감한 장수를 지칭하는 ‘바톨’에서 왔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둥글다’는 뜻의 제주 토착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작은 강이 감싸고도는 지형 모습을 칭하는 것으로 보지만 아직도 그 기원이 명확하지는 않다.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10여㎞ 떨어진 낮은 구릉(해발 120~210m)에 위치해 있다. 구릉 중심의 넓은 대지 위에 내성(內城)이 있는데, 북으로 약 3㎞ 떨어진 애월 해변까지 시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내성은 둘레가 750m가량인데, 과거엔 석성(石城)으로 알려졌지만 조사 결과 토성으로 확인됐다. 북쪽의 작은 언덕에 기대어 평탄한 남쪽 지역에 건물지(址)들이 배치돼 있다.
외성(外城) 주변으로는 경사면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 소왕천, 동쪽으론 고성천이 성의 해자(垓子) 역할을 해 ‘천연 요새’를 방불케 한다. 성내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 샘들이 있어 대규모 인원이 버틸 수 있다. 특히 성 주변에는 크고 작은 오름이 있는데 멀리서 접근하는 적의 동향을 일찌감치 살필 수 있어 방어 전략을 짜기에도 유리하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여몽 연합군에 패하고 지휘관 배중손 장군이 죽자, 김통정 장군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로 향했다. 그리고 한라산 북쪽 귀일촌(貴日村)의 항파두리성에 웅거한다. 이때가 1271년 5월로 기록돼 있으니, 제주도 날씨가 가장 좋을 때 이곳으로 건너온 셈이다.
삼별초는 강화를 떠날 때부터 ‘최후의 보루는 제주’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실제로 진도에서 항전할 때도 일군의 군사를 제주로 보내 이 지역을 수비하던 관군을 괴멸시키고 차지했다. 아마도 고려 조정의 수탈에 염증을 느낀 지역 주민들은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것이다.
제주도를 최후 거점으로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삼별초의 병력 규모가 향후 더 커질 수 없다는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할 때, 주민이 많은 큰 섬이 인력을 동원하기 쉽다. 또 육지와의 거리도 멀고, 해안선도 복잡해 방어에 유리하다. 아울러 식량 등 자원 조달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강화에서 궐기한 삼별초는 일종의 ‘해양 세력’인 만큼, 섬 지형과 해전에 익숙했다. 그러므로 연안(沿岸) 교통을 장악하면 장기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남해와 서해안을 오가는 조운선을 탈취하고 육지로 진격, 저항하는 지방관들을 처단했다는 기록들이 많다.
판축(版築ㆍ판자를 양쪽에 댄 뒤 그 사이에 흙을 넣고 단단하게 다져 성벽을 쌓는 방법)으로 쌓은 외성의 규모나 평면방형(平面方形)으로 쌓은 내성의 건축물 수 등을 고려하면, 당시 축성 작업이 짧은 시간에 이뤄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강화도ㆍ진도의 궁성과 같은 방식으로 전문 장인 집단에 의해 건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건물지에서 발견되는 단단한 기둥 적심(디딤돌)이나 기와, 청자 등의 유물로 미뤄볼 때 어느 정도 격을 갖춘 건물들이 내성에 들어서 있었다. 특히 기와의 경우 성 인근의 와요지(瓦窯址ㆍ상귀리, 고성리 등)에서 구운 것인데, 막새기와 형식인 것으로 미뤄 진도 용장성(龍藏城)을 쌓았던 장인 집단이 제주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진도에서 황급히 후퇴한 삼별초가 이 큰 성을 어떻게 짧은 시간에 조성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두고 지역 주민과 협력해 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내에서 발굴된 청자는 삼별초의 패망(1273년)보다 훨씬 이후인 14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다. 이는 항파두리성 유구(遺構ㆍ파괴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가 삼별초 이후에도 계속 증축됐음을 보여주지만, 명확한 관련 기록이 없다. 이 시기 제주도는 원나라 직할지였기에 고려의 기록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약 2,000명에 이르는 원나라 군인과 기술자들이 제주에 주둔했다는 사실에서 미뤄볼 때 항파두리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 해안은 전체적으로 수위가 낮고 곳곳에 암초들이 있는 데다 해변엔 크고 작은 돌도 많아 큰 배가 정박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유독 항파두리 북쪽 해안에는 조천포, 애월포, 명월포 등 상대적으로 접안이 쉬운 항구가 있다. 또 이 제주도 북안 지역에는 해안선을 둘러쌓은 환해장성(環海長成)이 120㎞ 정도 이어진다. 이 장성은 원래 고려 정부가 삼별초의 제주 상륙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나중엔 삼별초가 제주를 점령한 뒤 관군의 입도를 막기 위해 보강해 사용했다.
1만여 명의 여몽 연합군 전단(戰團)이 거친 풍랑 등을 뚫고 들이닥쳤을 때, 환해장성 부근에서 일차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전투 물자나 군사가 턱없이 부족한 삼별초는 패퇴하여 항파두리성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어 난공불락으로 생각됐던 항파두리성마저 하늘이 붉은색으로 변할 정도의 불화살 공격으로 함락됐다. 김통정은 스스로 처자를 죽인 뒤, 군졸 70여 명과 성에서 멀지 않은 붉은 오름으로 후퇴했고, 결국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붉은 오름’이라는 명칭이 당시 치열한 전투와 장렬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설화도 있는 것을 보면, 삼별초 최후의 순간이 얼마나 극적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몽골은 ‘항몽 세력’ 삼별초를 원정하는 과정에서 제주도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시베리아 초원을 말 달리던 유목민 입장에선, 대양 한가운데 떠 있는 큼직한 제주 섬의 풍광에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특히 그들이 발견한 제주의 가치는 바로 남송(南宋)과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ㆍ전략 기지로의 역할이다. 제주민들은 배를 제조하거나 항해하는 데 능숙했다. 이런 제주를 활용하는 것은 몽골이 동아시아 해양을 제패하는 데 필수 요건이라고 봤을 법하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말 방목장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제주도에는 넓은 초지가 형성돼 있어 말을 키우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래서 몽골은 1,700여 명의 몽골인을 이곳에 파견해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ㆍ1273년 6월)를 설치하고, 거의 100년 동안 직할지로 편입시키게 된다.
그래서 제주 문화는 삼별초 제주 항쟁 이전ㆍ이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몽골 습속, 방언 그리고 돌하르방 등은 남방 섬 문화에 북방 유목 문화가 접목되는 변동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런 문화 복합 현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 것이다.
고려 장수 김방경은 항복한 1,000여 명의 삼별초를 포로로 끌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만든 것)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려풍의 기와가 출현하는가 하면, 이 시기의 고려청자도 출토되고 있다. 아마도 제주를 탈출한 삼별초 유민들의 흔적일 것이다. 동아시아 해양사 속의 한국 문화의 흐름을 목격하게 되지만, 동시에 고국을 등진 난민들의 애잔한 삶도 떠오른다.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슬픈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인간의 아둔함을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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