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짓이겨져선 안 된다” - 전쟁과 노인 작가

“씨앗은 짓이겨져선 안 된다” - 전쟁과 노인 작가

입력
2023.11.23 04:30
20면

<34> 칼레드 후라니,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 케테 콜비츠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칼레드 후라니, 수박 이야기, 실크 스크린, 2007년. ⓒ Khaled Hourani

언젠가부터 수박은 정치적 과일이 됐다. 우리나라가 아닌 팔레스타인 이야기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구성하는 빨강, 초록, 검정, 흰색 대신 등장한 수박은 이스라엘의 탄압과 검열에 저항하는 상징이다. 지난달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실효 지배하는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수박 그림이 쏟아지고 있다. 저항의 의미로 수박이 처음 등장한 것은 40년 전 한 이스라엘 군인의 말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의 피카소’라 불리는 슬리만 만수르(Sliman Mansour)의 1980년 사건에서 출발한다.

당시 이스라엘 측은 만수르의 전시회를 금지시키며 “왜 정치 예술을 해서 이 고생을 하느냐, 꽃과 누드를 그리면 잘 팔리고 더 좋을 텐데”라면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작품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꽃을 빨강, 초록, 검정과 흰색으로 그려도 문제를 삼을 텐가?” 하고 그가 묻자 곁에 있던 이스라엘 군인이 “설령 수박을 그려도 안 되오!”라고 했다.

이 일화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퍼졌고 이야기를 들은 팔레스타인 예술가 칼레드 후라니(Khaled Hourani)가 2007년 그린 수박 그림이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인정받고 국기가 허용됐음에도 당시 수박 조각을 들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체포됐다.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팔레스타인 국기는 불법이 아니었는데, 올해 초 이스라엘은 다시 국기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때부터 SNS에 수박이 다시 등장했다.

빼앗긴 땅의 흙과 물감을 사용하는 76세의 팔레스타인 예술가

슬리만 만수르.


슬리만 만수르, 피난길, 캔버스에 유화, 1984년.

팔레스타인 서안(West bank)에 거주하는 76세의 만수르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화가다. 그의 1973년 작 ‘고난의 낙타’는 아랍권 현대회화 작품 중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지난 2018년 영국 BBC 인터뷰에서 앵커는 만수르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치예술가 또는 선동가라고 불리곤 하는데,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예술을 할 생각은 없나요? 만약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예술을 했을까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예술 창작이 과연 예술인지 묻는 질문이다.

이에 만수르는 답한다. “미술가, 음악가, 문인 등 모든 예술가는 정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정치적이지 않은 예술작품은 없다. 내 그림에도 꽃과 여인이 있지만 아마도 다르게 전달될 것이다. 내 그림은 내 경험을 토대로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한 그림이라고 믿는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물론 덜 힘들게 살았겠지만, 지금처럼 매일 작업실에 나와서 똑같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스라엘 북부와 서안지구는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으로 요르단이 점령했다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에 넘어갔다. 1947년에 태어난 만수르는 어린 시절 자신을 요르단인으로 알고 성장하다가 청년 시절부터 팔레스타인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됐다. 제1차 인티파다(1987~1993,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그는 ‘뉴비전’이라는 단체를 설립, 이스라엘 물감을 거부하고 오로지 팔레스타인 땅에서 난 재료와 안료를 사용했다. 그렇게 찾은 것이 팔레스타인 흙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흙을 개어 캔버스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는 “흙이 마르면서 생기는 균열 자체에 매료됐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일상에서 겪는 검열, 갈라짐, 분절이 마른 흙의 균열과 닮았다고 봤다.

실험 매체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평단에서 호평받았다. 이스라엘의 집권당 성향에 따라 그의 그림에 검열 수위가 풀렸다가 높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2021년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그래도 1980~1990년대는 희망적이었고 그 염원을 담아 팔레스타인의 이상향을 그렸는데, 최근 상황은 어려워졌다. 내가 태어나기 1년 전 빼앗겼던 자유다. 그러니 내가 죽기 1년 전에 되찾기를 꿈꾸고 있다.” 그렇게 말하며 웃던 인터뷰가 공개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지금,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 보건부의 지난 11일 보고에 따르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누적 사망자는 어린이 4,506명을 포함해 1만1,078명에 이른다.

슬리만 만수르, 두 사람, 우드판넬에 팔레스타인의 진흙과 안료, 2019년.


벌금을 내면서 반전벽화를 그리는 86세의 러시아 예술가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


러시아 칼루가주 보롭스크의 오래된 감옥 건물에 그려진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의 벽화 전경.

최근에는 국제뉴스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소식이 이전보다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0월 유엔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약 1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양측 모두 군인 사망자 집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군인 전사자 합계는 최소 11만 명에서 최대 32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의 86세 예술가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Vladimir Ovchinnikov)는 묻는다. “평화를 요구하는 그림이 왜 범죄가 되는가?”라고. 지난해 12월 NYT는 ‘손에 붓을 든 러시아 벽화가, 자신만의 전쟁을 벌이다’라는 제목으로 옵치니코프 이야기를 소개했다. 모스크바에서 토목공학자로 살다가 1998년 은퇴 후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주 보롭스크에 머물며 2000년 개인전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벽화를 그렸다. 그는 ‘보롭스크의 뱅크시’라고 불리는 잘 알려진 그라피티 아티스트(벽화 예술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별명이 못마땅하다. “나는 뱅크시처럼 숨어서 벽화를 그리지 않는다. 벽화에 내 이름을 남기고 벌금을 내고 또 그릴 것이다.”

폭격으로 부서진 우크라이나 건물에 벽화를 남긴 익명의 뱅크시는 안전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지만, 같은 메시지를 담은 블라디미르의 벽화는 벌금이 부과되고 지워지는 수난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 소녀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러시아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옵치니코프는 3만5,000루블(당시 약 53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심지어 전쟁을 지지하는 마을 주민이 던진 눈 뭉치에 맞기도 했다. 한때 그를 마을의 예술가로 칭송하고 아꼈던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페인트 칠로 덮여버린 자리에 다시 그림과 메시지를 남기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신변안전을 염려하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내 나이가 되면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잃을 게 많은 젊은이들을 대신할 수밖에”라고 답한다. “당국이 지운 우크라이나 소녀 그림은 소비에트 시대의 실제 포스터를 다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 벽화에 ‘향수(노스텔지어)’라는 제목을 붙였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 '로켓 없는 하늘, 이중 초상화, 노스탤지어' 벽화. 로이터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가 지난해 12월 7일 러시아 칼루가주 보롭스크의 한 건물에 벽화를 그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전쟁으로 아들과 손자 잃은 향년 78세 독일 판화가, “씨앗이 짓이겨져선 안 된다”

케테 콜비츠, 1927년. 후고 에르푸르트 사진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에칭 판화, 1903년.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필사의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싸우지 마라’, ‘이래 저래야 옳다’는 훈수 또는 정의로운 명령이 곱게 들리기는 어렵다. 현재진행 중인 두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자칫 공허한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운 순진한 지적은 아닐까 고민했다. 그럼에도 두 예술가를 소개한 이유는 독일 예술가 케테 콜비츠(1867~1945)가 유언처럼 남긴 그림 때문이다.

콜비츠는 독일 노동자의 삶을 대변하는 사회운동가, 히틀러와 나치에 저항한 정치인이자, 제1·2차 세계대전 내내 반전운동을 펼쳤던 예술가다. 중국의 사상가 루쉰(1881~1936)은 콜비츠의 작품을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예술정신”이라며 극찬했고, 영국의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서양미술사’ 초판본(1950)에 단 한 명의 여성 예술가도 포함하지 않았다가 개정판에 등장시킨 유일한 인물이다.

전쟁 예술가로 흔히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거론되지만, 전쟁의 아픔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콜비츠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고통스러운 자기 경험에 바탕한 가장 정직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첫 아들을 낳은 이듬해인 1893년부터 약 10년 동안 콜비츠는 ‘직조공’, ‘농민전쟁’ 연작으로 권력에 짓밟힌 노동자의 아픔을 그렸다. 1914년 둘째 아들 페터가 18세에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를 한 지 한 달 만에 전사했다.

콜비츠는 아들을 잃은 비통함에 절규하며 1923년 세 번째 연작 ‘전쟁’을 발표, 본격적인 반전운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지식인들과 반(反)파시즘 연대를 결성해 히틀러와 나치에 저항했다.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콜비츠를 베를린예술대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의 전시를 금지하며 탄압했다. 히틀러에 의해 의료활동이 금지됐던 의사 남편 칼 콜비츠가 1940년 사망했다. 1942년 큰 손자 페터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콜비츠는 아들과 손자, 남편을 모두 잃고도 저항적인 작품을 이어갔다. 1941년 74세가 된 콜비츠는 마지막 판화 작품을 남기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씨앗은 짓이겨져선 안 된다. 망아지처럼 바깥세상에 뛰어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늙은 여자가 꽉 움켜 안고 있다. 아이들이 다쳐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런 감상적인 갈망이 아니다. 이것은 명령이자 요구다.”(케테 콜비츠 일기, 1941년 12월) 콜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2주 앞둔 1945년 4월, 78세에 별세했다.

74세의 케테 콜비츠가 그린 마지막 판화, 씨앗은 짓이겨져선 안 된다, 석판화, 1941년. ⓒ Käthe Kollwitz Museum Köln

빼앗긴 땅의 흙과 물감으로 평화를 그리는 76세 노인, 벌금을 내면서 반전벽화를 그리는 86세 노인, 그리고 전쟁을 위해서 살지 말고 각자의 삶을 위해 살라며 판화를 남겼던 향년 78세 노인의 그림을 본다. 이들이 남긴 그림을 젊은 우리가 오늘 봐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씨앗은 짓이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더 이상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어린이가 희생되면 안 된다. 예술가들의 명령이다.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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