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정운찬 "입시에선 실패 모른 서울대생, 일본 야구에 져보며 세상 넓은 것 배웠죠"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입시 경쟁에서 져본 적 없는 서울대 학생들이 일본 도쿄대와 야구만 하면 깨져요.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무력감이 들었겠어요? 근데 그게 교육이에요. 실패에서 배우는 거죠.
정운찬(76)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은 서울대 총장이던 2005년 서울대와 도쿄대 야구부 간 교류전을 만들었다. 이후 통산 성적은 9전 전패. 도쿄대 선수들은 중고교 때 부카쓰(部活·부활동)에서 야구를 했기에 기본기가 탄탄했다. 시속 140㎞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도 있었다. 서울대 야구부원들이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지만 교육적 효과는 컸다. 야구를 통해 '건강하게 지는 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지난달 26일 서울 관악구 동반성장연구소에서 정 이사장을 만나 한국 스포츠를 어떻게 리모델링해야 할지 물었다. 그는 2018~2020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지낸 야구 '덕후'(마니아를 뜻하는 조어)이기도 하다. 대학과 프로 스포츠 분야 수장을 모두 지낸 그는 "운동을 교육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게 개혁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일반 학생과 학생 선수를 철저히 구분하고 한쪽으로만 걷게 만드는 구조부터 과감히 깨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일보의 '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기획보도에 대해 "한국 체육의 발전 방안을 말단부터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스포츠는 '받아들임의 미학'이다. 지든, 이기든 결과를 인정해야 도약할 수 있다. 애초 서울대와 도쿄대 간 야구 교류전은 국제협력 차원에서 시작됐지만,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져본 만큼 성장하는 예상 못한 효과도 거뒀다. 정 이사장은 "실패를 많이 해 본 사람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중요해진 혁신을 잘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생들도 도쿄대에 연전연패하면서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체감했고, 패배 이유를 복기하며 승리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정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줄인다고 하는데 이는 실패한 사람에게는 연구비를 안 준다는 뜻"이라며 "오히려 실패하면 더 줘야 한다. 단순히 (예산을 따기 위해) 점수를 잘 받으려고 안전한 시도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스포츠를 통한 '인생 수업'이 필요한 건 서울대생뿐만이 아니다. 정 이사장은 "모든 학생이 스포츠를 통해 규칙 속에서 경쟁하는 연습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학자인 그는 "스포츠를 통해 체력이 좋아지면 생산활동 때 효율도 높아진다. 학생들은 공부 체력이 더 좋아진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평범한 아이들의 운동량을 늘려주려면 교육 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일단 법정 체육수업 시간이라도 잘 지키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 현재 주 3시간 정도인 체육 수업(초 3~중 3 기준)을 더 늘려야 한다는 게 정 이사장의 의견이다.
정 이사장은 "대학 등 상급 학교 진학 때 체력 평가 항목을 조금이라도 넣으면 학생들이 운동을 더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과거 체력장처럼 등급을 매겨 점수화하지 말고, 통과 여부만 가려 반영하자는 아이디어다. 정 이사장은 "지금은 중고교 과목이 너무 많은데 이를 필수교과 위주로 재편하면 체육 수업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재능 있는 아이들이 운동을 시작하도록 하려면 현행 운동부 구조를 손봐야 한다고 했다.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 학업과 담을 쌓는 구조부터 과감히 허물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국무총리 시절인 2010년 '고교 야구 주말리그제'를 추진해 이듬해 도입됐다. 경기를 주말에 몰아서 편성해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려는 취지다.
정 이사장은 "운동과 학업의 병행은 미국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학생 선수들에게 교과 공부를 시키는 것을 두고 학부모들조차도 반발한다. 정 이사장은 "언젠가 젊은 프로야구 선수의 부모를 우연히 만나 '제가 주말리그를 만들었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첫마디가 '그래서 야구도 공부도 다 못한다'였다"고 회고했다. 그 선수는 현재 프로야구의 간판 스타로 성장했다. 정 이사장은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젊은 나이에 은퇴한다. 은퇴 이후를 생각한다면 학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한국 야구에 대한 애정 어린 쓴소리도 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야구가 금메달을 땄지만 사실상 병역 혜택을 목표로 대표팀이 구성돼 전폭적 응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저수지 격인 학교 운동부가 '선수 기근'에 시달리는 만큼 밑바닥부터 바꾸자고 했다. 저변이 약하면 성인 대표팀에 아무리 지원을 해도 경쟁력을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야구 관련 단체와 정부가 학교 야구부에 더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엉망이 된 코트, 벌어진 격차
외길 인생과 이도류 인생
입시 지옥에 잠겨 있는 체육관
일본 스포츠 '퀀텀점프' 비결
금메달 조바심 잠시 내려놔야
K스포츠 도약 위한 쓴소리와 약속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