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등굣길에 만둣국 끓이며... 이 가수가 40년 담은 '삶의 굴곡'

입력
2023.11.15 04:30
수정
2023.11.15 08:33
22면
구독

사진집 '삶의 고통' 낸 한대수
1달러80센트 받고 식당 아르바이트... 어머니 '눈물 편지' 매주 받고 서울로
불끈 뒤 톱 키며 노래한 '남산 공연'... 김민기, 양희은과 막걸리 마시던 신장위동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으로 소환된 반전 노래 '행복의 나라로'... "10대 딸 미래 안타까워"

한국 포크 음악의 태동을 알린 한대수의 1집 '멀고 먼 길'(1974)은 올해로 발매된 지 꼭 50년이 됐다. 한대수는 "음악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마찰을 빚고 가정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며 "하지만 내게 음악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 퀸스 거리에 기타를 들고 나선 한대수. ⓒ제이슨 서

한국 포크 음악의 태동을 알린 한대수의 1집 '멀고 먼 길'(1974)은 올해로 발매된 지 꼭 50년이 됐다. 한대수는 "음악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마찰을 빚고 가정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며 "하지만 내게 음악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 퀸스 거리에 기타를 들고 나선 한대수. ⓒ제이슨 서

지난달 20일 오후 9시 2분. 미국 뉴욕에 사는 가수 한대수(75)에게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현지 시간은 오전 8시, 딸 양호(16)를 학교에 막 보낸 뒤라고 했다. '한국 포크록의 대부'는 해뜨기 무섭게 일어나 만둣국을 끓여 딸의 아침밥을 준비했다. "주부 생활로 바쁩니다." 한대수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딸 교육을 위해 2016년부터 뉴욕살이를 시작했다. 일흔이 다 돼 타향살이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딸에게 그와 똑같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물리학을 전공한 서울대 공대생이었던 한대수의 아버지는 아들이 갓 100일이 지났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돌연 실종됐고 그 뒤 어머니는 재혼했다. 조부모 손에 자란 '소년 한대수'는 늘 외로웠다. 그는 "고독과 공허함이 삶이 헛돼 보일 정도로 유년 시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줬다"고 말했다.

"양호가 태어났을 때 결심했죠.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줘야겠다'고요. 부모가 성년이 되기 전 자식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8년이에요. '기러기 아빠'로 돈 버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전 딸과 같이 인생을 경험하고 싶었어요.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18년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삶의 고통'이란 제목으로 사진집을 낸 한대수는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비극적인 종말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라피티가 가득한 미국 뉴욕 맨해튼 소호거리에 앉아 있는 한대수. ⓒ조지 정

'삶의 고통'이란 제목으로 사진집을 낸 한대수는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비극적인 종말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라피티가 가득한 미국 뉴욕 맨해튼 소호거리에 앉아 있는 한대수. ⓒ조지 정

"외롭게 자라 사는 게 매일같이 힘들었다"는 한대수가 최근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 발행)을 냈다.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이방인 취급받았던 그에게 카메라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그는 목에 건 카메라로 다양한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찍으며 비로소 세상과 만났다. 사진 촬영은 그의 삶 일부이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 수의학과를 중퇴한 뒤 전공을 사진으로 바꾼 그는 한국에서 낸 모든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된 뒤 가수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작가로 밥벌이를 했다. 한국에서 사진기자로 일한 적도 있다.

한대수는 미국 뉴욕에 40여 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조지 정

한대수는 미국 뉴욕에 40여 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조지 정


쿠바 혁명 단체가 소형 폭탄 만들던 건물의 아찔함

책엔 1966년부터 2007년까지 그가 40여 년 동안 찍은 사진 100여 장이 실렸다. 수십만여 장의 필름에서 한대수가 5,000여 장을 암실에 들어가 직접 인화한 뒤 고르고 추렸다. 그 안엔 '영원한 히피'를 만든 결정적 시간과 공간이 빼곡히 담겼다.

한대수가 1966년 미국 뉴욕에서 일했던 레스토랑 '세렌디피티3' 모습.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가 1966년 미국 뉴욕에서 일했던 레스토랑 '세렌디피티3' 모습. 북하우스 제공

흑백 사진엔 고단했던 청년 한대수의 삶이 돋을새김 된다. 1966년 미국 뉴욕의 유명 식당 '세렌디피티3' 주방. 당시 한대수는 이곳에서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했다. 음료를 만들며 그가 받은 시급은 1달러 80센트였다. 수의대를 자퇴한 뒤 집에서 학비뿐 아니라 생활비 지원도 뚝 끊겨 당장 월세(50달러)가 급했던 그에게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일자리였다.

한대수가 1969년 찍은 미국 뉴욕 전경.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가 1969년 찍은 미국 뉴욕 전경.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가 1960년대 미국에서 살았던 건물.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가 1960년대 미국에서 살았던 건물. 북하우스 제공

그는 일터에서 꿈에도 그리던 비틀스 멤버 존 레넌도 만났다. "식당 부엌을 총괄했던 분을 만나러 찾아갔다 레넌과 눈이 딱 마주쳤죠. '존, 당신의 음악을 사랑해요'라고 하니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이틀 동안 구름 위를 걸어다녔죠. 일할 땐 앤디 워홀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봤고요."

당시 그는 뉴욕의 슬럼가인 이스트 빌리지에서 살았다. "쥐도 돌아다니고 아래층에선 쿠바 혁명 단체가 소형 폭탄을 만들었죠. 사업차 뉴욕에 온 외삼촌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해 한국에 가 어머니한테 '당장 대수 데려와야 한다'고 하셨죠. 어머니한테 '제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매주 편지가 왔고요."

1969년 서울 명륜동 달동네 단칸방에서 살던 청년 한대수의 모습. 북하우스 제공

1969년 서울 명륜동 달동네 단칸방에서 살던 청년 한대수의 모습. 북하우스 제공


명륜동 달동네, 포크록의 태동

눈물 자국이 가득한 편지지를 받은 한대수는 결국 마음을 돌려 1969년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아들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모니카 불어대며 기타 치는 장발의 아들이 어머니는 영 못마땅했다. 한대수는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뒤 언덕 위의 달동네로 쫓겨났다. 그의 쪽방엔 기타와 징 같은 서양과 동양의 악기가 공존했다.

한대수가 1969년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다. ⓒ박양재

한대수가 1969년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다. ⓒ박양재


한대수가 1960~70년대 음악 방송에 함께 출연했던 송창식(왼쪽)과 그룹 펄시스터즈.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가 1960~70년대 음악 방송에 함께 출연했던 송창식(왼쪽)과 그룹 펄시스터즈. 북하우스 제공

사진으로 소개된 이 방에서 한대수는 1969년 9월 남산 드라마센터 리사이틀을 준비했다. 그는 공연에서 조명을 모두 껐다. 어둠이 내린 공연장에 들리는 건 시계 초침 소리뿐이었다. 무대에선 향이 피어올랐다. 한국에 처음 상륙한 히피의 전위적 무대는 관객뿐 아니라 한국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500여 명의 관객이 있었는데 다들 '뭐야, 정전이야?'라며 수군댔죠. 칙칙~ 기차소리 내면서 큰 톱 들고나와 '우웅~' 하고 톱을 켠 뒤 '장막을 걷어라~'라며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죠. 1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고 싶었거든요, 하하하."

1968년 무교동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청년은 그렇게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이며 1974년 '물 좀 주소!' 등이 실린 1집 '멀고 먼 길'을 냈다. 이 앨범은 세상에 나오지 못 할 뻔했다. "'행복의 나라로'를 1969년 발표했는데 그땐 이미자, 남진씨가 주름잡던 시대라 포크 음악 앨범을 만든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어요. 음반 계약을 못 하고 군에 갔죠. 1974년에 제대하고 나니 고맙게도 양희은씨가 '행복의 나라로'를 불러 입소문을 탔고, '바람과 나'를 부른 김민기씨가 인기를 얻으면서 곡 발표한 지 5년 뒤에야 앨범 계약을 맺은 거죠." 그렇게 포크 음악 불모지에 물을 댔던 김민기와 양희은은 한대수의 신장위동(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있던 옛 동네) 단칸방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블루스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1969년 서울 신장위동에 마련된 한대수의 방 풍경. 천장에 네온사인이 달렸다. 벽엔 그의 1집 앨범 재킷 사진 등이 걸려 있다. 북하우스 제공

1969년 서울 신장위동에 마련된 한대수의 방 풍경. 천장에 네온사인이 달렸다. 벽엔 그의 1집 앨범 재킷 사진 등이 걸려 있다. 북하우스 제공


2003년 미국 뉴욕에서 진행된 평화 시위. 북하우스 제공

2003년 미국 뉴욕에서 진행된 평화 시위.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가 딸에게 미안한 이유

요즘 '행복의 나라로'는 세계 유명 숙박공유업소 업체 에어비앤비의 CF에 삽입돼 TV 등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한대수는 이 곡에서 "장막을 걷어라"라며 전쟁을 비판한 뒤 공존을 노래했다. 세상에 나온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곡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전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맞물려 평화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에 다시 소환되고 있다. 그는 종교투쟁으로 안타깝게 스러져 가는 이들을 보고 '노 릴리전'(1997)을 만들었다.

한대수는 책 뒷부분에 '노 워'를 주제로 1967년과 2003년 뉴욕에서 평화 시위를 벌이는 군중의 사진을 여럿 실었다. 1집을 낸 뒤 올해로 50년을 맞은 노장의 화두는 '평화'다. "양호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해군에 있을 땐 '베트남 전쟁이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될 거야'라고 했는데 학살과 복수의 순환이 끝을 모르고 있죠. '피스 앤 러브', 이 말을 계속 외쳐야 우리의 미래도 있습니다."

양승준 기자

관련 이슈태그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