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R&D 예산' 기준 모호… 혼란스런 연구현장 '해외 인맥 찾기'

'해외 인맥 찾아야 하나'... 혼란스러운 연구 현장 "섣부른 협력이 비효율 낳을라"

입력
2023.11.15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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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재단, 글로벌R&D 문의 폭증에 안내문
"다양한 형태로 추진"... 여전히 기준 모호
연구성과 소유권, 지식재산권 어떻게 하나
해외서 눈독 들여... 철저한 사전준비 필요

편집자주

2024년도 R&D 예산 삭감으로 공론화된 'R&D 비효율화의 효율화'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연구재단이 지난 8일 "기초연구사업의 글로벌 협력 강화 방향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겠다"며 홈페이지에 '2024년도 기초연구사업 시행 공고 관련 사전안내'를 게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구개발(R&D) 분야 글로벌 협력을 강조한 뒤 R&D 예산이 외국과의 공동연구 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연구자들의 문의가 쏟아지자 아예 안내문을 내건 것이다.

글로벌 협력에 대한 정의나 조건은 물론, 결과물의 소유권 배분 등에 대한 제도적 기틀도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R&D 예산이 국제공동 연구에 집중될 거란 예상에 연구현장의 혼돈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섣부른 협력이 또 다른 비효율을 낳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여기도 '글로벌', 저기도 '글로벌'

한국연구재단이 11월 8일 홈페이지에 게시한 안내문. 연구재단 홈페이지 캡처

연구재단은 안내문을 통해 "해외 연구자 참여, 국내 연구진 해외 파견, 연구기관 초청·방문, 해외 연구시설 활용, 국제공동 학술대회 개최, 인력교류, 기타 과제 특성에 따라 연구자가 제시하는 방안 등 다양한 형태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결국 어떤 연구 방식이 글로벌 협력으로 인정되는지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윤영찬·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내년부터 기초연구지원사업의 세부 내역 사업 대다수 명칭에 돌연 '글로벌'이 붙는다. 이학 분야 선도연구센터(SRC) 사업은 '글로벌 SRC'로, 공학 분야 선도연구센터(ERC) 사업은 '글로벌 ERC'로 바뀌는 식이다. 우수한 중견연구자를 지원하는 사업은 '유형1', '글로벌유형2', '글로벌협력형', '글로벌매칭형' 등으로 세분됐다.

과기부는 변경 이유에 대해 "해외 우수기관과의 공동연구 지원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는데, 연구 현장에선 결국 내년부터는 해당 사업에 신청하려면 외국 연구자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갑자기 해외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력해야 각 글로벌 조건에 맞는 건지 재단 측에 숱하게 문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한 중견 연구자는 "(뭐가 글로벌인지) 소문만 무성하다. 해외 한인 교수들이 '연구비가 내게도 돌아올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한다"고 했다. 기초과학 분야 한 연구자는 "대통령이 보스턴 클러스터를 강조한 바람에, 보스턴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끈' 찾느라 바쁘다"고 귀띔했다. 정부가 신설한 사업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톱티어 연구기관 간 협력 플랫폼 구축 및 공동연구 지원 사업'과 '디지털 혁신기술 국제공동 연구 사업'은 각각 100억 원, 30억 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인데, 협력 상대국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 같은 혼란에 대해 과기부 관계자는 "어떻게 글로벌화할지 계획 수립 중, 현장 충격을 줄이기 위해 의견 수렴 중"이라는 원론적 답변을 내놓았다.

준비 없는 예산 투입, 좋은 성과 나올까

윤석열 대통령이 2일 대전 유성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열린 대덕연구개발특구 50주년 미래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격려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R&D 예산 재검토와 국제협력 확대를 지시한 이후 과기부는 각 부처들에 R&D 구조조정 및 글로벌 R&D 재투자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전체 R&D 예산이 줄삭감되는 가운데서도 글로벌 협력 부분은 당초 계획보다 3.5배 불어났다(관련기사 ☞ [단독] 과기부 지침에 두 달 새 글로벌 R&D 예산 3.5배... "돈도 기술도 흘러 나갈라").

하지만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예산만 투입했다가는 아무리 앞선 나라와 협력해도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우려가 크다. 과학계에선 이명박 정부의 WCU(세계 수준의 연구중심 대학) 사업을 그런 사례로 꼽는다. 당시 이 사업을 통해 들어온 해외 석학들이 국내 체류 조건을 채우지 않고 돌아가거나, 강의 실적이 모자라는 등의 문제가 국정감사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해당 사업으로 신설된 학과·전공은 신입생 미달 사태마저 발생하기도 했다.

국제협력을 뒷받침할 제도도 부실하다. 현행법상 해외기관은 국가연구개발사업에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하다. 국제협력으로 얻은 연구성과의 귀속, 지원 체계, 지식재산권 등과 관련한 가이드라인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소유권 배분 방식, 기술료 산정과 납부 방법 등이 협약 전에 구체화될 필요가 있는데, 가이드라인이 없어 연구기관의 혼란이 예상된다. 국내 기관이 불리한 조건으로 협약을 맺을 우려도 있다"고 짚었다. 과기부는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인데, 이번 달 발표될 'R&D 제도 혁신안'에는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연구자들은 성급한 변화가 더 큰 비효율을 낳을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한 과학정책 전문가는 "국제협력은 상대국과 이해관계, 신뢰도, 과학 수준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라 쉽지 않은데, 지금처럼 급하게 추진하면 외국에 돈을 퍼주거나 인맥만 끌어 쓰는 식이 될 것"이라며 "한국에 쓰여야 하는 돈이 외국으로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예산정책처 역시 "국제협력 사업은 사전 준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는데, 일부 준비가 미흡하다"면서 "예산을 적정 규모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협력에 목매는 정부에 볼멘소리까지 나온다. 한 원로 과학자는 "한국 기술을 배우려고 줄 서는 경우도 많은 마당에, '외국 것이 좋다'는 인식이 매우 섭섭하다"고 일갈했다.

오지혜 기자
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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