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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기엔 껄끄럽고, 맞서기엔 손해… 한일관계 ‘중간 정도 친구’를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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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2019년 초겨울부터 쓰기 시작한 칼럼이 어느새 100회다. 4년 동안 칼럼을 쓰면서 일본에 대한 질문을 제법 많이 받았다. “일본인은 왜 데모를 하지 않는가?”, “정말 혐한이 많은가?” 등 시사적인 질문도 있었고, “스시 맛집을 알고 싶다”든가 “가성비 온천을 소개해달라”는 등의 개인적인 질문도 있었다. 일본에 대한 관심이 실로 다양하다고 느꼈고, 한국과 일본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하는 사안이 수없이 많다고도 실감했다. 지금까지 한일관계나 역사문제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말을 아꼈다. 거시적인 사안에 대해서 큰 목소리로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굳이 말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일 간 문화적 공통점이나 차이점, 한일 젊은이들의 고민과 관심사 등 일반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이슈를 주로 소개해왔다. 그런데 이번 칼럼에서는 한일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00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칼럼의 세 자릿수 회차가 시작되는 것을 자축할 겸 조금 거창한 주제를 택했다.
◇ 한일 서로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긍정이 공존
일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한일관계라는 관점에서는 식민지 시대와 관련한 역사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위안부 동원이나 강제 징용 등 제국주의 시대에 자행된 인권 침해 사안에 대한 한일 간 시각 차이가 크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전범의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흠 있는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많은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이런 오만한 태도가 손톱 속에 박힌 가시처럼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이라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오염수의 해양 방류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껄끄러울 만한 사안은 오히려 늘었다. 이전보다도 더 크게 ‘반일’을 부르짖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상황도 있다. 얼마 전에 부산 전포동의 밤거리를 거닐었는데, 두 집 건너 한 집이 라멘이나 스시 등 일본 음식을 내는 전문점이요, 사방이 일본어 간판을 당당하게 내걸고 영업하는 가게들이었다. 내가 지금 난바(難波, 오사카의 대표적인 번화가)를 걷고 있는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 문화에 대해 호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로 일본을 꼽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순위권을 차지하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다. 소위 ‘힙’하다는 동네에는 세련된 분위기의 일본식 주점이 어김없이 큰 인기를 끈다. 소비문화를 이끄는 기성세대에서도 ‘일본풍’이 어느 정도는 수용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에 대해서라면 부정적인 인식이 컸기 때문에, 일본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각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가감 없이 일본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낼 정도로, 일본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자리 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일본에 한국은 ‘신뢰하기 어렵다’, ‘억지를 부린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권 교체에 발맞추어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가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 역사 수정주의와 우경화가 가속화하고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약화하는 상황에서, 이웃나라에 대한 배타적인 정서도 커지고 있다. 극우 성향의 단체는 대로변에서 노골적으로 “한국인은 돌아가라”고 외친다. 한일 관계의 현 상황과는 무관하게 인터넷에는 늘 한국에 대한 악플이 넘친다. (다만, 이런 점에 대해서는 한국의 인터넷 공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혐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하지만 그와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도 있다. 일본에서 세대를 막론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친밀감과 호감이 눈에 띄게 커졌다. 2000년대 초반에 ‘한류’ 드라마로 한국 사회에 관심을 가진 기성세대도 있고,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K팝이나 웹툰의 ‘덕후’를 자처하게 된 젊은이들도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호감으로 넓어지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 제일 ‘핫’한 메뉴는 치즈핫도그, 떡볶이, 양념통닭 등 한국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군것질거리다. 관광을 위한 방문도 늘었지만, 소셜미디어 등에서 수시로 정보가 공유되면서 한일 간 젊은이들의 취향이 부쩍 가까워지고 있다. 일본에서 재직했던 대학에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공하는 학과가 있었다. 학령인구 감소로 일본의 대학에서도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한국학과에는 늘 지원자가 넘쳤다. 지금도 이 학과에서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옛 동료를 얼마 전 재회했는데, 올해 입시에서도 역대급 경쟁률을 예상한다고 한다.
◇ 한일관계는 “중간 정도 친구”를 목표로
한일 서로에 대한 평가에는 냉온탕이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혐오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부정적인 담론이 들끓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정이나 집착에 가까워 보이는 강한 호감이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기 때문에, 한일관계에서는 어떤 스탠스를 취하든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실제로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는 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당장 이번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선 것은 반갑다. 하지만,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류와 같은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판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반면, 이전 정부에서는 한일관계가 줄곧 얼어붙어 있었다. 강제 징용 배상을 둘러싼 견해 차이 등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한일 간 서로에 대한 호감이 쭉쭉 올라가던 와중에, 문화적, 경제적 협력의 기회를 놓친 것도 사실이다. 일본 사회의 정치적 우경화는 한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명분을 내세워 정면으로 대립하기보다는 실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에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 일본은 이래저래 참 어려운 상대다. 친하게 지내기에는 껄끄럽고, 맞서기에는 손해가 크다. 그런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면 좋을까?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누구나 이런 동급생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성격도 안 맞고 취미도 달라서 마음속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베프’는 아니다. 하지만 싸울 정도는 아니어서, 종종 알맹이 없는 이야기도 나누고 운동회에서는 서로를 응원하기도 한다.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 친구, 굳이 말하자면 ‘중간 정도 친구’다. 사실 ‘중간 정도 친구(中くらいの友だち)’라는 기발한 문구는,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의 제목이다. 한국 문화나 한국 문학에 대한 글을 모아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잡지인데, 한국에 사는 일본인, 일본에 사는 한국인 등 두 나라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글쟁이들이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고도 아니고 최저도 아닌, 한일 간 ‘중간 정도’의 우정을 모색하는 잡지”라는 설명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과 일본이 당장 ‘베프’를 선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일관계를 개선한답시고 일본 정부의 반인권적인 역사 인식을 옹호하거나 해양 오염에 눈 감아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도 바람직하지 않다. 설사 도저히 안 맞는 측면이 있더라도 동급생으로서 적당한 친근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른스럽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중간 정도 친구’. 당장의 한일관계는 딱 그 정도를 목표로 삼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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