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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의 열린 경사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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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님이 인테리어를 엄청 중요시하세요. 경사로 깔겠다고 건물주님에게 말했다가 혼났어요."
경사로 설치 설득을 위해 두 번째 방문했던 성수동 A카페에서 들은 얘기다. 옛날 건물을 깔끔하게 고쳤지만 앞에 20㎝의 큰 턱이 있어서 휠체어나 유아차로는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다. 첫 방문 때 눈빛을 반짝이며 건물 주인에게 경사로 설치에 대해 말해보겠다던 카페 매니저는 풀이 죽은 듯 미안해했다. A카페는 경사로 설치를 거절당한 25번째 장소였다.
지난 6월부터 휠체어-유아차가 접근 가능하도록 경사로를 놓고 지역적인 해결책을 찾는 '모두의 1층' 프로젝트를 변호사, 건축사 등의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하며 200여 개가 넘는 성수동 매장의 접근성을 조사했다.
경사로 설치 프로젝트를 성수동에서 진행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개성 있는 음식점과 카페, 팝업스토어가 즐비해 MZ세대가 많이 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기억은 나중에 두고두고 상처로 남는다. 휠체어를 타는 10대 딸은 성수동을 동경하지만 실제로 많이 방문하진 않는다. 성수동에는 반지하나 계단 10개 정도를 올라가야 하는 1.5층이 있는 옛날식 건물이나 공장을 개조한 매장이 많다. 휠체어를 아무리 들어 준다고 해도 딸이 친구들과 갈 만한 곳이 적다.
이렇게 낡은 건물을 개조한 매장들은 특이한 인테리어로 각광받지만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가 없다. 같은 성수동 지역이지만 서울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아차가 숲 뒤편의 오밀조밀한 음식점과 카페가 많은 '아뜰리에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유다.
경사로 설치를 설득하기 위해 들어갔던 한 매장에서 이렇게 휠체어, 유아차에 '안 보이는 벽'을 실제로 확 느꼈다. 이 매장 안쪽엔 아예 '노키즈존'이라고 쓰여있었다. 순간 3년 전, 휠체어 접근성 정보 수집을 위해 한 대학교 앞 리서치를 나갔다가 국밥집 앞에 설치된 경사로를 보고 "사진 찍지 말아요. 장애인 안 와요!"라며 사진 촬영을 막던 국밥집 주인의 성난 얼굴이 기억났다. 프로젝트명이 '모두의 1층'인데 유아차를 반기지 않는 곳에 경사로를 설치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이런 힘 빠지는 경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시민들의 '마음의 경사로'는 이미 깔려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성수지역 방문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83%는 접근가능한 매장이 더 편리하다고 답변하는 한편 "동일한 조건이라면 경사로 설치 매장에 방문할 것"이라고 응답한 비중은 72%에 달했다. 성동구에서 경사로 설치를 위한 조례를 제정하자며 서명 운동에 참여해 준 시민 숫자는 당초 목표 3,600명을 훌쩍 넘어서 6,000명에 달했다.
우리 프로젝트를 통해 경사로를 설치한 4개 매장 사장님들은 새로운 고객층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 매장 사장님 중 한 명은 "경사로를 깔았더니 캐리어 든 손님이 엄청 많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성동구가 '모두의 1층' 프로젝트 팀의 소망을 담아 지난달 20일 국내 최초로 '경사로 설치 조례' 제정을 예고한 것은 고무적이다. 이 조례가 제정된다고 1.5층이나 반지하에 경사로를 설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건물을 새로 리모델링할 때, 인테리어를 할 때 적어도 경사로 등 각종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는 있게 되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계단을 없앨 순 없어도 '모두의 1층'을 넘어 모두의 2, 3, 4층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의 경사로'는 좀 더 많이 깔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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